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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우리만의 역사를 쓴다, 추억의 힘으로 - <수카바티: 극락축구단>202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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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만의 역사를 쓴다, 추억의 힘으로 -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송아름(영화평론가)
모든 것엔 중심이 있다지만, 사실 그것이 정해지는 과정은 꽤나 폭력적이다. 누군가를 밀어내거나 중심이었던 것을 빼앗으며 변두리화하는 것, 그 사이 부각되는 ‘합리적’이란 수사는 다수를 위한다는 알리바이로 작용하며 누군가의 중심을 깨뜨린다. 서울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이 나라에서 위성도시들은 대체로 이러한 경험을 공유하며 지금에 이른다. 서울 부근 다수의 도시들은 과거 서울에서 미처 수용하지 못한 (혹은 수용하지 않을) 무수한 공장들을 품으며 성장했고, 마치 이 나라의 명운을 짊어진 듯 막중한 책임을 지닌 곳으로 호명되었다. 그러나 서울이 성장하고 더 이상 작은 공장들에 기대할 것이 없어지면서 사람들은 이곳을 떠났고 공장들은 문을 닫거나 작아지며 활기를 잃어갔다. 경기도 안양은 정확히 이러한 경로에 놓여 있던 소도시였다. 흥하던 많은 것이 빠져나간 후 이곳에 남은 것은 공이 빠져도 꺼낼 생각을 하지 않을 더러운 하천과 낡아진 공장터,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하루하루였다. 여기는 왜 이다지도 재미없을까 라는 의문이 더 이상 높아질 수 없을 즈음, 프로축구단 LG치타스의 안양 입성으로 시끄러울 일 없던 곳이, IMF 직후 괴로움이 가득했던 곳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신명나던 안양의 부활, 다큐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은 안양을 시끄럽게 해줬던 축구단에 무한 사랑을 보낸 서포터즈 RED의 자취를 짚어가며 한 도시의 공동체성을 담아낸다. 축구단을 응원하기 위해 TV에서 본 불꽃을 찾아 무작정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자비로 마련해 응원법 찾는, 어찌보면 막무가내의 행보는 ‘홍염’이라는 안양 서포터즈만의 시그니처를 남긴다. 불꽃뿐만 아니라 냄새와 소리로 관중석을 감싸 안은 RED의 응원은 마치 축구가 그들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듯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서포터즈에게 서포터즈 활동은 그들의 열정을, 사람을, 그리고 추억과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었다. 결코 떨쳐낼 수 없고, 떨쳐낼 생각도 없는 나의 일상. 안양FC는 이렇게 서포터즈들의 삶에 속속들이 끼어들어 서로를 연결해주고 또 응원해주며, 종종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기도 또 화해하기 만들기도 하는 삶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안양FC는 2003년 갑작스레 연고지를 서울로 옮기겠다 선언하면서 안양이라는 도시를 떼어놓기에 이른다. 물론 여기에는 매우 ‘합리적’인 이유들이 있었다. 서울에는 제 쓰임을 다하지 못한 월드컵 경기장이 있었고 안양과 비교할 수도 없는 숫자의 서포터즈가 가능할 테니 여러모로 옮기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것이었다. 맞다, 매우 논리적이고 또 그럴만한 사정은 차고 넘쳤을 것이다. 당연히 이 과정에 안양FC가 안양에서 어떤 의미였는지를 고려할 자리는 없었다. 이에 대한 절망과 울분에는 사실 축구단의 이전뿐만 아니라 안양이라는 공간의 전사(前史)로 인한 슬픔까지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서포터즈의 인터뷰 속에서 간간히 파악되는 안양이라는 공간의 흥망성쇠는 서울의 그것과는 역행하는 것이었고, 온 힘을 쏟아부었던 축구단의 이적은 그 아쉬움에 불씨를 당긴 셈이었다. 늘 그렇듯 합리적인 의사 결정은 간절한 자의 편이 아니었고, 서포터즈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결정은 번복되지 않은 채 안양FC는 안양에서 사라졌다.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은 이들의 울분을 그리 길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주목한 것은 그 이후 행보였다. 서포터즈가 내린 결정은 다시금 안양에 축구단이 창립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시장을 찾아가 건의하고, 시에서 창립할 수 있는 근거를 찾고 문건을 만들며, K리그 경기장마다 플래카드 보내 안양의 뜻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바로 그곳에 또 다른 중심을 찾는 서포터즈의 열정이 있었다. 물론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그들을 연결해주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추억에 대한 옹호였다. 축구단 창립에 대해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붓는 이들에게는 지역을 넘나들며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절박한지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또 다른 공동체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어떠한 합리성도 경제적 이익이라는 계산도 필요치 않았고 축구와 함께한 시간, 경기를 같이 본 이들과의 술 한잔, 서포터즈에서 만난 이와의 사랑에 공감할 수 있는 또 다른 우리가 있었다. 이들의 응원은 다시금 안양을 들뜨게 했고 안양은 새로운 축구단 창단을 맞을 수 있었다.
안양 서포터즈가 안양FC에 보내는 무한 사랑은 자신들의 하루하루와 추억에 대한 헌사일 것이다. 동네가 바뀌면서 더 이상 기억나지도 않는 곳들은 그 자리를 메운 축구단과 함께 했던 사람들로 인해 놓치지 않는 기억이 될 수 있었다.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이 주목한 것은 바로 여기였다. 누군가 어떤 이유로 함부로 중심을 꺾어 놓는다 해도 다시금 중심을 채우는 우리의 기억에 대한 소중함, 안양이라는 도시와 데칼코마니처럼 놓인 서포터즈 RED의 행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조금은 다른 결과를 낳았다. 서포터즈가 가지고 있던 공동체성은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논리에 제동을 걸었고, 서로에 대한 믿음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자신들의 추억을 지키고 만들어갈 수 있었다. 안양FC가 이기든 지든 경기의 관람 자체에 환호하고, 상대에겐 누구보다 사납지만 우리 선수들에게는 무한한 찬사를 보내는 것은 여기에서 기인할 것이다. 선수들의 마지막 비빌 언덕이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다짐은 그들이 만들어갈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무조건적일지, 그래서 얼마나 무한할지를 기대하게 한다. 이 나라가 커나가며 지우고 치워놓은 것들을 스스로 살려 나간 이들의 이야기, 거기에 바로 ‘수카바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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