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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자의 필요>: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 한국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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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필요>: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 한국
김경욱 (영화평론가)
홍상수 감독의 31번째 영화이자 제74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은 <여행자의 필요>에서, 프랑스 여자 이리스(이자벨 위페르)는 불어를 가르치는 신박한 방법을 생각해낸다. 교제를 중심으로 수업을 하는 게 아니라 수강생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수강생이 느낌을 말한 내용을 이리스가 불어로 옮긴다. 이리스는 카드에 불어 문장을 쓰면서 동시에 워크맨에 녹음한다. 수강생은 자신이 말했던 내용이 불어로 옮겨진 문장을 읽고 들으면서 불어를 익히게 된다. 이리스의 설명에 따르면, 그 불어 문장에는 수강생의 느낌이 담겨 있으므로 외국어가 자신의 진실한 감정을 표현한 의미 있는 무언가로 다가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리스는 첫 번째 수강생 이송이 피아노 연주를 하자 ‘피아노를 치면서 무엇을 느꼈냐?’고 묻는다. 이송은 ‘행복을 느꼈고 멜로디가 아름답다는 걸 느꼈다’고 답한다. 이리스는 ‘자기 안에서 무엇을 느꼈냐?’고 재차 묻는다. 이송은 ‘실력이 출중한 피아노 연주자가 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자신에게 짜증이 났고 그런 자신이 지겹다’고 답한다. 이리스의 두 번째 수강생은 이송의 친구 엄마 원주인데, 기타 연주를 들려준다. 이리스는 이송에게 했던 질문을 원주에게도 한다. 흥미롭게도 원주는 이송의 대답과 거의 비슷한 대답을 한다. 홍상수 영화의 형식적 특징으로 손꼽히는 ‘반복’이다.
수업을 마친 이리스와 이송은 아파트 입구의 석비를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석비에는 이송의 아버지가 가장 많은 돈을 기부했기 때문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리스는 이송에게 석비를 볼 때의 느낌을 묻는다. 이송은 ‘민망하다’면서, ‘아버지가 자신을 아주 많이 사랑했다’며 슬퍼한다. 이리스가 원주와의 수업을 마친 다음에는 윤동주의 ‘서시’가 새겨진 석비 앞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 원주는 어렸을 때 집을 나간 아버지를 원망했는데 결국 용서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했다며 회한에 잠긴다. 이송과 원주가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차이’는 반복과 함께 홍상수 영화의 형식적 특징이다.
수업을 모두 마친 이리스는 인국의 집으로 간다. 한국에 왜 왔는지 왜 머물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나이 많은 프랑스 여자 이리스와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젊은 한국 남자 인국의 사이가 정확하게 어떤 관계인지는 모호하다. 인국이 전자 피아노를 연주하자 이리스는 격려하며 시 쓰기를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리스가 샐러드를 만들면 인국은 빵을 만든다. 인국이 근린공원에서 피리를 불고 있던 이리스를 집으로 데려와 거처를 제공한 것처럼, 두 사람은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 인국의 엄마가 등장하면서 파란이 생긴다. 한국 엄마 연희는 이리스와 인국 사이를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연희가 두 사람의 관계를 추궁할 때, 인국은 연희가 알아듣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인국이 악기를 연주하기는 하지만, 작고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송이나 원주와 달리 살아있는 엄마가 나타나 설전을 벌이고 이리스와 헤어지라고 은근히 종용하듯 김치찌개를 끓여준다. 따라서 내러티브 구조의 패턴으로 생각해보면, 두 번째 에피소드가 첫 번째 에피소드의 차이가 가미된 반복이라면, 세 번째 에피소드는 첫 번째 에피소드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흥미로운 지점이 아주 많은데, 특히 이송과 원주가 자신의 악기 연주에 대해 거의 비슷하게 토로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국 여자’라는 공통점밖에 없어 보이는데, 악기 연주에 대한 느낌을 비슷하게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악기 연주를 업이 아니라 행복한 시간을 위한 취미생활로 하면서도 강박적으로 ‘성과주의’에 사로잡혀 연주와 음악 자체를 즐기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실력이 부족하다며 자신에게 화를 내고 질책하며 괴로워한다. 또 원주는 이리스의 독특한 수업 방법의 효과를 미심쩍어하며 돈과 시간을 투자한 만큼 성과를 얻지 못할까 걱정한다. 최근 미국 작가 마크 맨슨이 유튜브에 올린,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로 규정해 화제가 된 영상과 맞물리는 대목이다. 이 영상에서 맨슨은 ‘한국인이 성과를 내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심리학자 이서현은 ‘한국 사회는 경쟁이 매우 심해서 완벽주의자가 많고, 100점을 얻지 못하면 실패로 느끼고 수치심에 사로잡히는데, 그게 우울증과 정말 연관이 있는 것 같다’고 분석한다.
반면에 이리스(아마도 이 영화는 ‘이자벨 위페르’라는 너무나 특별한 배우가 아니었다면 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는 성과주의와 배치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모나미 볼펜을 사용해 손으로 글을 쓰고, 휴대용 카세트테이프리코더를 사용하고, 핸드폰이 없다. 녹색을 사랑하고, 땅에 맨발로 걷는 것을 좋아하고, 개울이 나타나면 발을 담그고, 넓은 바위가 있으면 누워서 쉰다. 인국의 엄마와 대면했을 때는 불필요한 마찰과 감정 소모를 피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돈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고, 생막걸리(아마도 위페르가 좋아하는 술인 것 같다)를 즐기며 쓸데없는 근심이나 걱정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영화 포스터의 문구에는 이러한 이리스에 대해 ‘최대한 사실에 근거한 삶을 살려고 애쓴다’고 설명한다. 이리스가 원주와 해순의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리거나 공원 벤치에서 이리스와 똑같은 여성이 피리를 부는 장면에서 이리스는 유령 같은 느낌을 준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사라져 버렸다는 얘기가 아닐까? 이리스를 보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진짜 필요한 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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