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MOVIE
- <길위에 김대중>, 인동초의 삶2024-01-19
-
<길위에 김대중>, 인동초의 삶
김경욱(영화평론가)
2024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후 김대중으로 표기)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24년부터 2009년까지, 김대중이 살았던 시간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맞물려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1945년 해방, 1950년 한국전쟁, 1960년 4ㆍ19혁명, 1961년 5ㆍ16 군사쿠데타, 1980년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1997년 IMF 외환위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은 김대중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또한 한국 현대사의 중심인물로서, 주요 사건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따라서 김대중은 어떤 대하소설이나 대하드라마의 주인공보다 더 극적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민환기 감독이 연출한 <길위에 김대중>은 방대한 자료(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영상 포함)를 바탕으로 어린 시절부터 1987년까지의 김대중의 삶을 2시간 6분의 분량으로 엮은 다큐멘터리이다. 자료화면과 함께 장현성 배우의 내레이션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하고, 김대중과 부인 이희호 그리고 주요 주변 인물들과 연구자들의 인터뷰는 그 사건에 대한 개인적 소회 또는 견해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영화의 완성도에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배경음악의 사용이다. 배경음악이 거의 모든 장면에서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고 있는 데다 화면과 잘 조화되지도 않고 때로는 너무 커서 말소리까지 잘 들리지 않기도 한다.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새로 접하게 된 사실은 그가 정치를 하기 전에 사업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사업가가 아니라 젊은 나이에 엄청나게 성공한 사업가였다는 것이다. 사업에서의 경험과 재능은 이후 정치 현장에서 이상적인 대의명분에 매몰되기보다는 현실적이고 융통성 있게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 같다. 예를 들면, 1965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 협정을 추진할 때, 대부분의 야당 정치인들은 무조건 반대를 했지만, 김대중은 미국의 대일정책을 고려해 일본과 협상을 할 수밖에 없다면 조건을 최대한 한국에 유리하게 조정해보자고 제안했다. 강성의 투사로 각인된 김대중의 이미지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면모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까지, 강력한 야당 지도자로서 제거해야 할 일 순위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은 죽음을 넘나드는 탄압과 수난을 겪으면서 더욱 강인한 투사로 나아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김대중은 더욱 폭넓고 깊이 있는 인간으로 성장했다. 전두환의 계엄사령부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최후진술을 하게 되었을 때, 김대중은 “내가 죽더라도 반드시 민주주의는 돌아온다. 그때 여러분들이 오늘 우리한테 이런 일을 저지른 분들에게 보복하지 마라, 보복하지 말고 민주주의만 확고히 해라, 사람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 시기 감옥의 CCTV에 찍힌, 언제 사형이 집행될지 알지 못한 채 담배를 피우며 깊은 사색에 잠긴 김대중의 모습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있는 것 같아 인상적이다. 극영화에서 만들어내기 거의 불가능한 순간이며,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루는 대상이라는 생각을 확인하게 된다.
사형이 무기로 감형된 이후의 김대중에 대해, 데이비드 맥칸(『옥중서신』 영문판 번역자)은 “자신의 부당함에 대한 분노를 극복하고, 자신의 길을 계속 가기 위해 그는 적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한다. 20세기의 꽤 오랫동안 한국 정치 문화는 원한의 정치를 중심으로 구축되었는데, 김대중은 감옥에 있는 동안 그 대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라면서, 김대중을 한 인간으로, 정치적 지도자로, 믿음의 실천을 가진 자로 평가한다.
이러한 김대중의 깊은 성찰은 이 영화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를 알려준다. 김대중은 역사의 발전을 믿으며 용기를 갖고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남북으로, 동서로, 이념과 가치관의 차이로 갈라져 대립하고 반목하는 한국사회의 비극적 상황을 정치를 통해 극복하는 길을 찾고 실천하려 했다. 김대중의 시대 이후, 민주주의의 가치가 점점 더 훼손되고, 차이에 따른 갈등의 양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위기의 한국사회에서, 그의 삶이 던지는 울림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 다음글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내면의 여름이 노래할 때
- 이전글 <흐르다>, 아빠에게 가는 ‘험난한’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