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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미상> -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시선2021-01-27
1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2021.1.16.(토) 영화의전당 소극장

 

 

1월 이지훈의 시네필로

영화 <작가 미상>: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시선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작가 미상>(Werk ohne Autor, Never Look Away, 2018)은 한 화가의 기구한 삶이 예술 창작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그렸다. 주인공 쿠르트의 많은 부분이 실존 인물 게르하르트 리히터에 상응한다. 쿠르트란 이름도 게르하르트의 어릴 적 애칭인 게르트와 가깝다. 이 점에서 영화는 전기 영화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한 성공담은 아니다. 영화는 심층적으로 복잡하고, 논쟁적이다.

   영화가 논쟁적이라고 말하려면, 먼저 리히터의 공식 평전이 아주 밋밋하다는 점을 말해야 한다. 2002디트마 엘거가 지은 평전 말이다(Gerhard Richter: A Life in Painting, Dietmar Elger, 2002. 엘거는 리히터 아카이브의 큐레이터다). 이 평전이 밋밋한 이유는 리히터 본인에게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리히터는 자신의 이력 관리에 너무나 철저하고, 삶과 사생활을 드러내는 데 있어 매우 방어적이다.

   더욱이 리히터는 삶과 작품의 연관성을 예술이론 차원에서, 근원적으로, 명시적으로 반대한다. 그러면서 익명성(‘작가미상’)을 내세운다. 영화 결말부 쿠르트의 기자회견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기자 1: <어머니와 아이>는 누굴 그린 거죠? 본인과 모친인가요?

쿠르트: 아뇨, 그냥 아마추어 사진입니다. 내가 누굴 그리는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누구라도 리히터를 두고 삶과 작품의 연관성을 거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론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반면 영화는 리히터의 입장에 맞선다. 감독 나름대로의 해석을 통해 작가의 삶과 작품이 깊이 연관됐다고 주장한다. 감독은 위대한 예술은 심층적으로 자전적이라고 말하며, 특히 이모 마리안네와 연관된 기억이 리히터의 세계관과 창작(모티브, 방법론)에 큰 영향을 줬다고 밝힌다. 영화가 논쟁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다.

 

작가의 삶과 작품을 함께 생각하기

 

게르하르트 리히터 감독

 

 

   사실 예술작품을 생각할 때 자전적 접근과 결별하는 것, 말하자면 작가의 삶과 작품의 관계를 배제하고, 작품을 그 자체로 완결된, 자율적인 소우주처럼 다루는 것은 모더니즘 예술론의 강령이다. 어쩌면 1910년 프로이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년 기억>을 발표한 뒤로 최근까지 호평보다 악평을 많이 받은 것도 그런 모더니즘 흐름과 연관이 있을 법하다.

   영화도 프로이트의 논문과 닮은 점이 있다. 2015년 도너스마르크 감독과 한 달 가까이 내밀한 대화를 나눈 리히터 또한 감독이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한다고 했을 정도니까. 물론 엄밀한 뜻에서 심리학 개념으로 작가를 분석한 영화는 아니다. ‘팩트차원에서 감독은 상당 부분 위르겐 슈라이버의 탐사 르포 어느 가족의 드라마(2005)에 기대는 한편, 2015년 비공개로 진행된 감독 자신과 리히터의 인터뷰에서 출발한다.

   『어느 가족의 드라마는 이모의 죽음에 연관된 비밀을 내포하고, 비공개 인터뷰는 아내와 관련된 비밀을 내포한다. 두 이야기를 합쳐보면, 한 명의 악인이 중심에 놓여 있다. 저명한 산부인과 의사이자 나치 추종자였던 그 악인은 리히터의 이모가 조현병 증세로 입원하자 불임수술을 받게 하고, 끝내 숨지게 만들었다(어느 가족의 드라마). 또 종전 뒤에는 리히터의 아내에게 낙태수술을 하고, 그녀가 더는 아기를 갖지 못하게 만드는 불임시술을 했다(감독과 리히터의 인터뷰).

   그 악인은 바로 리히터 아내의 아버지, 즉 장인이었다. 영화는 이 끔찍한 이야기를 서사의 핵심 모티브로 삼는다. 그런 한편 리히터의 예술세계를 그 서사와 결합한다. 이때 감독이 주목한 것은 1964년부터 1966년까지 리히터가 가족 그림을 쏟아낸다는 것, 또 리히터가 마치 이 모든 비밀을 알았던 것처럼, 적어도 무의식 차원에서는 진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감독은 쿠르트라는 인물을 통해 리히터의 자연’ ‘우연에 관한 예술론, 1960년대 포토 페인팅회화, 그리고 이 작품들에서 특징적인 흐리기(blurring)를 재해석한다. 이처럼 삶의 서사와 예술을 연결하는 구성이 독창적이고, 흥미롭다. 이 연결에는 엘리자베트 이모의 역할이 중요하게 설정된다.

 

 

퇴폐 예술 전시회

 

스틸이미지

 

  

   오프닝 장면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1937년 나치는 쿠르트의 고향인 드레스덴에서 <퇴폐예술> 전시회를 연다. 당시 엘리자베트 이모는 스무 살이고, 쿠르트는 다섯 살이었다. 말하자면 쿠르트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단계에 해당하는 나이였다. 전시 가이드의 해설을 듣는 이모와 쿠르트의 양옆으로 두 조형 작품이 세워져있다. 크리스토프 폴의 <임신한 여인>과 오이겐 호프만의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이다.

   이 설정은 이모와 쿠르트의 운명을 암시한다. 키워드는 임신과 광기다. 나치는 구석기 시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닮은 <임신한 여인>을 퇴폐예술로 분류했다. 민족 번영에 큰 역할을 하는, 신성한 임신을 기형적 형태로 비하한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한편 쿠르트는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에 사로잡힌다. 조각상의 눈을 응시하며 얼굴을 들이댄다. 들뢰즈의 표현처럼 그 눈은 흰 벽에 뚫린 검은 구멍처럼 크고, 깊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눈. 모든 것을 응시하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눈. 이것은 예술가의 눈이며, 광기의 눈이다. 전시 해설가는 이처럼 세상을 다르게 보는 예술가들을 비판하며, ‘유전병환자의 제거를 말한다.

 

전시 해설가 : 소위 이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보기 때문에 자신들이 묘사하는 대로 믿는 겁니다. 그들 시력의 문제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지, 유전병 때문인지 반드시 밝혀야 합니다. () 후자라면 그런 끔찍한 시각적인 질병이 후대로 전해지지 않게 막아야 할 것입니다.

 

 

   ‘후대로 전해지지 않게 막는다.’ 예술가 성격을 지닌 이모가 이듬해 스무 살 나이에 정신병원에 입원해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고, 7년 뒤 안락사를 당하는 이유다. 이처럼 광기와 예술의 친연성을 부정, 억압하는 정책은 전후 동독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교육에서도 반복된다.

   영화는 엘리자베트 이모와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을 동일시한다. 이모의 시선은 여러 차례 신비스러운통찰과 진정성을 보여줬다. 마침내 생의 마지막 날 환자들이 들어간 샤워장은 흰색 타일에 푸른빛을 띠고, 이모의 머리카락은 푸른빛을 띤다. 이모는 퀭한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본다.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처럼 조용히 서서, 독가스로 죽어가는 여인들과 학살자들을 응시한다.

   이모의 응시는 쿠르트의 응시와 교차편집으로 이어진다. 비행기 소리에 잠을 깬 쿠르트는 영·미 연합군 폭격기가 드레스덴 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엄마는 쿠르트를 등 뒤에서 껴안으며 그의 눈을 가리려 하지만 쿠르트는 엄마 손을 젖히고, 먼 하늘 드레스덴이 불바다로 변하는 광경을 응시한다. 쿠르트와 이모의 응시가 병치된다. 그런 가운데 쿠르트는 또 한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의 눈을 갖게 된다.

 

이모, 또는 엘리(자베트)

 

   이 응시의 병치는 어느 정도 현실에 상응한다. 마리안네 이모는 19452월 드레스덴이 잿더미가 된 날. 스물일곱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화에서 이모와 드레스덴은 상징적 등가물이다. 두 존재의 붕괴는 창조적 광기와 예술의 붕괴를 뜻한다. 드레스덴은 작센 지방의 수도로 엘베 강의 피렌체로 불리던 예술도시였다. 이모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창밖을 보며 말한다.

 

 

이모: 네 말이 맞아. 드레스텐은 정말 아름답구나.

 

   자막에서 아름답구나타의 추종을 불허한다’(unschlagbar, 영어 unbeatable)는 대사를 옮겼다. ‘물리칠 수 없는’ ‘천하무적이란 뜻이다. 한 가족의 드라마에 따르면 당시 드레스덴 사람들은 이 도시가 너무 아름답기에 아무도 손댈 수 없다’(unantastbar, ‘난공불락’ ‘불가침’)고 믿었다. 이모의 말은 드레스덴이 무너지는 장면과 대비된다. 쿠르트에게 소중한 이들의 죽음과 함께. 이때 소년이 받은 상처는 1950년대 드레스덴 예술학교 창 너머로 보이는 성모교회의 잔해에 상응하며, 뒷날 폭격기그림으로 표현된다.

   그럼, 쿠르트에게 이모는 어떤 존재였을까. 이모 이름은 기이하게도 쿠르트의 아내 이름과 같고, 두 여인은 모두 원치 않는 불임수술을 받는다(이 수술의 배후에는 같은 인물이 있다). 한편 다섯 살 난 쿠르트가 이모 무릎에 누워 젖가슴을 보는 모습, 조숙하게 여자 누드를 그리는 모습, 이모가 나체로 피아노 연주를 하는 모습에는 분명 에로틱한 뉘앙스가 있다.

   감독은 유아기의 쿠르트가 이모에게 이성적 사랑을 느꼈다고 본 것 같다. 쿠르트가 훗날 이모와 같은 이름의 여자에게 마음이 끌리게 된 것도 이 관점에선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녀를 좋아하고 보니 우연하게도 그녀 이름이 엘리자베트였던 게 아니라, 그녀 이름이 엘리자베트였기 때문에 그녀를 좋아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적어도 시작은 그랬다는 거다. 감독의 관점은 프로이트와 비슷한 데가 있다(프로이트는 다섯 살 전후로 형성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정신을 분석하고, 이후 창작활동과 연결했다).

   이 관점에서 영화를 재구성해보자. 쿠르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모 곁에서 자란다. 쿠르트는 아버지의 금지·억압 없이 이모와 정신적으로 에로틱한 관계를 형성했다. 또 이모는 조카의 예술적 재능을 북돋운다. 그런데 이 사랑은 뜻밖의 사건으로 무너진다. 이모가 정신병동에 들어간 것이다. 사랑은 억압된다. 하지만 무의식 속에 깊이 가라앉는다. 그 무의식은 평생 쿠르트를 떠나지 않는다. 이십 대로 성장한 쿠르트는 이모와 같은 이름의 여인을 만난다. 이를 계기로 사랑과 예술의 열정이 거듭난다. 쿠르트는 유아기 때의 이모에 대한 사랑을 아내의 사랑과 새로운 예술의 창조로 승화시켜나간다.

 

세상의 공식

 

   다섯 살의 쿠르트가 여자 누드를 그리는 모습과 이십 대의 쿠르트가 엘리(자베트)를 그리는 모습이 대비된다. 엘리를 그리는 책상 위에는 드레스덴 폭격을 알리던 신문 기사, 병원 간호사들의 단체 사진 따위가 흩어져 있다. 이것은 쿠르트에게 이모의 문제가 여전히 지속되는 가운데 이모와 엘리가 중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이모는 쿠르트에게 사랑과 예술의 숨은 동력이 된다. 쿠르트는 무의식적으로 이모의 언어를 따라 한다. 벨텐포르멜(Weltenformel)이 대표적이다. ‘세계를 설명하는 공식’ ‘모든 것의 이론’(만물이론)을 뜻한다. 1948년 쿠르트는 아버지에게 달려오며 말한다. “이제 알았어요. 이해했어요.”

 

쿠르트 : 모두 다요. 모두 어떻게 연결됐는지. 모든 게 연결되어 있어요.

세상의 비밀을요... 아무도 못 건드려요.

 

   자막은 이모가 세상의 공식을 찾고, 쿠르트가 세상의 비밀을 찾았다고 옮겼지만, 원래 대사에서 두 사람은 같은 단어를 말했다(실제 리히터의 이모인 마리안네도 그런 말을 했다. “나는 단지 정신을 지니고 있지 않을 뿐입니다. 정신은 사라져버렸어요. 나는 법칙들 Gesetze을 알고 있어요.” 한 가족의 드라마).

   또 기자회견에서 진실한 것은 모두 아름답다고 말할 때 화가는 이모의 말씨(리듬, 끊어 읽기, 호흡)를 따라 한다(Alles, / was wahr ist, / ist schön). 그리고 엔딩 장면 쿠르트는 이모의 버스 경적 합주를 따라 한다. 이 일련의 장면들은 쿠르트의 무의식 속에서 이모가 사랑과 창작의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먼저 이모가 세상의 공식을 말하는 장면부터 살펴보자.

 

이모: 이 음은 음악의 모든 힘을 다 담고 있어. 삶을, 우주 전체를.

사람들은 세상의 공식을 찾아. 하지만 여기 있어.

 

   이모는 거실에서 벌거벗은 나체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거실 바닥에는 나치 깃발과 독일소녀동맹’(BDM: 나치 청소년 조직) 제복이 널브러져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짚어보자. 하나는 이 장면이 드레스덴 거리의 총통 환영 행사에 이어지는 바로 다음 장면이란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 이모가 연주하는 곡이 바흐의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라는 점이다. 이 곡에 대해서는 약간의 정치적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곡은 종교적인 노래가 아니다. 1713J. S. 바흐가 작센 군주의 생일에 헌정한 노래로 사냥 노래’(<내가 좋아하는 것은 활기찬 사냥뿐!>)에 포함된 아리아다. ‘사냥 노래는 사냥에 미쳤던 작센 군주에게 아첨하는 성격을 띤다. 말하자면 사냥에 미친 군주를 용맹한 통치자로 미화하는 용비어천가. 이 맥락에서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라는 가사는 용맹하게 늑대들을 물리치는 통치자 덕분에 백성들이 잘 산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두 장면이 이어진다. 앞서 총통 환영 행사에서 제복 차림을 한 이모는 히틀러에게 꽃을 헌정했다. 그리고 지금 이모는 바흐가 영주에게 헌정한 곡을 연주한다. 평소에 이모가 히틀러에게 비판적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현재 이모가 갈등에 빠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모는 바흐가 영주에게 곡을 헌정한 행위와 자신이 히틀러에게 꽃을 헌정한 행위가 같다고 여기며, 갈등한다. 이모가 정신 분열을 겪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이모가 나치 깃발과 제복을 모두 벗고 나체가 된 것도 이 같은 갈등과 저항의 의미가 있다.

   이모가 재떨이를 부수고 자신의 머리를 때리며 피아노 연주를 대신하는 행위 또한 권력에 봉사하는 정치 이념과 관습적 예술에 저항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어디서든 연주할 수 있어.” 예술이 꼭 제도·관습적인 예술 형식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피아노 건반 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재떨이가 내는 소리처럼 미미한 것, 무의미한 것, 우연한 것에도 깊은 예술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이모가 발견한 세상의 공식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대목은 훗날 쿠르트가 뒤셀도르프 예술학교에서 접하게 될 플럭서스예술운동과 요세프 보이스의 행위예술과 상통한다. 특히 플럭서스 그룹이 피아노에 톱질을 하는 것으로 연주를 대신하는 <피아노 활동>(Piano Activities, 1962), 또 피아노에 도끼질을 하고 잡동사니를 설치하는 백남준의 행위예술과 <총체 피아노>(1963)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행위는 모두 예술을 재-정의하려는 시도였고, 정교하지만 인위적인 틀에서 예술을 해방시키려는 시도였다.

 

우연은 진실의 문

 

   이처럼 사소하고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존재에도 깊은 의미(‘음악의 모든 힘’ ‘’ ‘우주 전체’)가 있다는 이모의 생각은 쿠르트가 신문 기사의 사진으로 가족의 비밀에 접근하는 장면과 연결된다. 실제 리히터는 서독에 정착한 1962년부터 신문, 잡지 사진을 비롯해 갖가지 사소한 이미지를 수집한다. 그것은 예술과 쓰레기 사이에 있는 모든 것... 왠지 나에게 중요할 것 같고, 버리기에 애석한”(1999년 인터뷰) 이미지들이다. 2013<아틀라스>란 이름으로 공개된 이 거대한 콜렉션은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리히터의 창작 원천이었다.

   한편 1948년 쿠르트가 나무 위에서 발견한 세상의 비밀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그 모든 것이 연결된 방식이다. 영화는 이 주제를 1964년부터 1966년까지 이뤄진 화가의 작업과 결합한다. ‘환자 살인자’, 이모, 제반트 교수의 가족사진과 여권 사진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이들은 서로 무관해보이며, 이들을 함께 배치한 것은 우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심층적으로는 연결돼 있고, 하나의 진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이모의 죽음이다. 주목할 점은 화가가 자신의 그림들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의식하지 못한 채 작업을 했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자신도 모르게어떤 진실에 다가갔다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의 비밀이 뭔지 알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됐지만, 그 연결은 우리에게 우연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쿠르트와 장인이 함께 있던 식당에 신문팔이가 들어와 환자 살인자체포 소식을 알린 것도 우연이고, 그 신문 이름이 <빌트>(Bild, 이미지)란 것도 우연이며, 작업실 창에 바람이 불어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미지가 겹쳐지게 된 것도 우연이다.

   쿠르트는 화폭에 신문기사 제목인 환자 살인자를 써놓고는 마음에 들지 않아 뭉개버린다. 그러고는 신문 이름 <빌트>를 보더니 사진으로 눈을 돌린다. 이때 문자에서 이미지로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면, 뒤에 발생할 이미지의 겹침도 없었을 것이고, 이미지들의 연결을 통해 진실에 다가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세계는 우연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럼, 화가가 이 우연을 포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되도록 작가의 개입을 줄이고, 세계가 스스로를 드러내게 해야 한다. 여기서 예술=자기표현이라는 예술 개념에 맞서고, 예술작품을 작가의 철저한 연출·통제로 여기는 작품 개념에 맞서는 리히터의 반()작가주의는 우연 개념과 한 몸을 이룬다. 쿠르트가 보도 사진을 포함한 누군가의 아마추어 스냅사진을 활용한 이유일 것이다.

 

쿠르트: 왜 제일 허접한 사진이 내 그림보다 더 실제 같지?

 

 

   이런 사진은 이른바 작가 사진(또는 회화)보다 의도, 연출, 계획이 훨씬 적다. 그 결과로 이들은 우연하게 찍힌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 사진보다 현실에 가깝다. 이렇듯 아마추어 사진을 활용한다는 것은 인위적인 작가의식과 연출·개입을 최소화하고 작가미상, 익명성에 다가가며, 현실에 접근한다는 것을 말한다.

   실제 리히터는 우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60년대 포토-페인팅에서부터 컬러차트(색상 표), 스퀴지, 그리고 2011년 스트립 연작에 이르기까지. 영화 모티브가 되는 포토-페인팅의 경우, 사진의 선별과 흐리기(blurring)의 결과는 작가 연출을 벗어난 우연을 수용한다. 흐리기의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리히터는 나는 자주 우연이 나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다”(1986년 인터뷰)고 했다.

  예술이 우연을 활용하는 시도는 다다’ ‘초현실주의가 이미 잘 보여줬다(가령 막스 에른스트의 데칼코마니, 앙드레 브르통의 자동연상, 스냅사진). 이들은 우연을 작가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들어가는 문으로 여겼다. 이제 쿠르트는 우연을 무의식뿐 아니라 세계의 진실에 들어가는 문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진실의 세계는 자연과 연결된다.

 

자연처럼 그리기

 

작가미상 특별강연 이미지

 

 

   리히터의 우연 개념은 음악가 존 케이지와 뒤셀도르프 예술학교 친구인 지그마르 폴케와 통한다(케이지는 1963년 뒤셀도르트 예술학교에서 열린 플럭서스 축제에서 공연했다. 또 영화에서 감자에 집착하는 아렌트 이보는 폴케를 표현한다). 1992년 케이지는 마지막 대중강연에서 나는 모든 사운드를 즐기며 들었다. 사운드의 유일한 문제는 음악뿐이라 했다.

   또 예술가는 자연을 모방해야 한다는 아난다 쿠마라스와미의 말을 인용하며 케이지는 잘 구성된 예술음악에 반대하고 우연을 음악에 도입한 이유를 밝혔다. 이때 자연의 모방은 자연의 외형이 아닌 자연의 작동(생성·생산) 방식을 모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리히터는 우연을 자연의 과정으로 여기고, 인위적(=정태적) 구성에 반대한다.

   리히터는 우연을 이용하는 것은 자연처럼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1985. 2. 작가 일지). 이렇게 해서 자연, 무의식, 우연, 예술이 통합된다. 영화는 이 개념을 바람으로 표현한다. 세상의 비밀을 발견할 때 마을에 불던 바람(리히터가 1943년부터 1948년까지 살던 발터스도르프는 일명 바람 마을이다). 또 작업실의 이미지들을 뒤섞던 바람. 감독이 리히터의 자연=현실=생성=우연=무의식=진실 개념을 바람으로 표현한 것은 재치 있다.

   자연은 우연을 통해 변화 생성하고, 조화를 이룬다. 생물계가 예측할 수 없는 변이(=우연)를 통해 진화(=필연)하듯. 보이지 않는 손’(=자연선택)을 통해 조화를 이루듯. 리히터는 예술에서 우연을 활용하는 근거로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을 예로 든다(1986 ‘벤자민 부흘로와 인터뷰).

   화가가 이용하는 우연은 맹목적인 무작위와 다르다. 자연과 공조·일치하며 생성에 참여하는 우연이다.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참된 것’(echt, 영어 genuine)이다. 영화 자막(번역은 일부 고침)에서 일관되다고정·불변이 아니라 조화로운, 통일적인, 알맞은, 정합적인’(stimmig, 영어 consistent)이란 뜻이다.

 

 

기자 3: 아마추어 스냅사진과 똑같은 구도로 그리는데그건 다 우연이란 의미겠죠?

쿠르트: 아뇨, 우연이 아닙니다. 실재하고, 참되고, 일관된 거죠.

오직 현실만이 일관되고, 모든 현실은 일관됩니다.

진실한 것은 모두 아름답습니다.

 

 

   세계는 불가해한(incomprehensible) 방식으로, 우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리히터에게 예술은 그 무의미하게 보이는 우연의 연쇄에서 의미를 연결 making sense”하고, 의미를 추출하는 작업이다(1962년 작가 일지). 그럼에도 예술에는, 세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요소가 남아있다. 달리 말해 참된 예술은 불가해성을 그린다. 영화는 이 모티브를 로또 번호에 대한 생각으로 표현했다.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기

 

   영화는 쿠르트가 발견한 세상의 비밀을 이모의 죽음에 얽힌 비밀로 연결한다. 그런데 화가가 환자 살인자를 그리는 장면에서 오페라 <아서 왕>(1691)의 아리아 이 들린다. 오페라는 아서 왕이 색슨 종족 왕에게 납치된 약혼녀 에멀린 공주를 구해내려고 분투하는 내용이다.

   색슨은 곧 작센이고, 쿠르트의 고향이다(드레스덴은 작센 주의 주도다). 공주를 납치해 마법의 숲에 가둔 색슨 왕과 마법사는 나치 세력(환자 살인자, 장인...)을 연상하게 하며, 불행한 공주는 엘리자베트 이모/아내를 떠올리게 한다. <콜드 송>은 얼음 속에서 죽음처럼 긴 잠을 자던 겨울 정령공기의 정령의 부름에 깨어나는 장면을 노래한다.

   ‘나를 깨우는 자가 누구냐? 영원한 눈을 침대 삼아 자고 있는 나를.’ 영화는 쿠르트, 즉 예술가가 망자의 긴 잠을 깨우는 권능을 가졌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처럼 예술이 과거, 진실을 일깨우고, 다시 기억하게 하는 장면은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벤야민은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것을 과제로 여긴다. 그것은 패배자, 배제된 자, 천민의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본다는 뜻이다. 승리자 중심의 역사가 주변으로 밀어낸 기억은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에서 해골처럼 왜상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심층적 욕망이 의식 외부로 밀려났을 때처럼. 꿈 많던 이모의 삶이 병원 서류에는 단지 가치 없는 삶을 뜻하는 빨간 플러스로 남은 것처럼.

   과거는 자신을 기억, 복원, 구원해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객관적인 역사가의 눈에는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 오직 구원의 염원을 지닌 자들만이 그런 기억을 복원할 수 있다. 벤야민은 여기서 과거와 우리 세대 사이에 어떤 비밀 약정이 있다고 했는데, 영화는 그것을 쿠르트의 서약으로 이야기한다.

   열여섯 살 난 쿠르트는 세상의 비밀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난 예술가가 안 돼도 돼요. 뭐든 해도 돼요. 옳은 걸 찾을 거예요. 진실한 것을요.” 우리는 이 서약이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환자 살인자를 그린 날, 쿠르트는 오랜만에 열정적으로 엘리(자베트)를 끌어안는다. 그녀의 불임 소식을 들은 뒤로 오랜만에.

 

흐리기, 현재적 트라우마

 

이지훈의 시네필로 강연 사진

 

   쿠르트는 수 십 장의 사진 가운데 이모와 본인을 담은 사진을 선택하고, 화폭에 옮긴다. 사진이 완벽하게 모사됐지만, 화가는 뭔가 모자란다는 표정으로 그림을 본다. 불현듯 이모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소년은 이모가 끌려가던 모습을 손가락 사이로 봤고, 시야는 흐려졌다. 아니, 흐리게 만들었다. 그 광경을 견뎌낼 수 있도록.

   “눈길 돌리지 마. 절대 눈 돌리지 마.” 그러나 눈뜨고는 차마 보기 어렵다. 이 긴장 속에서 흐린 이미지가 나타난다. 화가는 폭이 넓은 붓을 꺼내, 그림에 솔질을 한다. 그림은 화가의 뇌리에 남은 이미지처럼 흐려진다. 과거의 기억 이미지와 현재의 예술적 지각 이미지가 더는 분리되지 않는다.

   리히터의 흐리기 이미지에는 수많은 해석이 있다. 또 흐린 이미지는 1960년대의 문화적 트랜드이기도 하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붉은 사막>(1964)과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1964)은 현대인(자아, 사회)의 불확실성을 표현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렇듯 화가의 트라우마 기억과 흐리기를 연결한다. 영화 화면이 흐려지는 장면이 여러 번 있다. 이모가 병원으로 끌려가는 모습. 가족들이 병원에 찾아간 날(이모는 이미 가족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이송됐고) 간호사들이 즐겁게 단체 사진을 찍는 모습. 아버지가 자살한 모습. 장인이 엘리의 낙태수술을 하러 들어가고 문이 닫히는 모습.

   이들의 공통점은 상실, 고통이다. 어떤 대응도 할 수 없는 무력함. 억압되고, 배제되는 순간, 패배의 순간이다. 또 지금도 패배는 반복되고 있다. 과거의 패배와 현재의 패배가 공시적으로 공명한다. 영화는 이처럼 과거와 지금시간의 트라우마가 중첩된 산물이 리히터 작품의 흐리기라고 해석한다. 말하자면 흐리기는 현재 진행적 트라우마의 시각적 표현이다.

 

계단을 내려오는 엘리(자베트)

 

 

   확실히 흐리기에는 거리 두기필터링효과가 있다. 흐리기는 끔찍한 이미지를 견딜 만한 이미지로 바꿔준다(가령 아버지를 그린 <호르스트와 개> 1965). 이 같은 자기 보호효과는 현실에 대한 불신, 공포, 상처를 반영하는 한편 중립성, 불확실함, 규정될 수 없음, 모호함이란 성격을 지니는 작가의 현실 인식을 보여준다. 흐리기의 거리두기 효과는 작가의 내면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작용한다. 관객의 시선에서도 이미지가 멀어진다는 뜻이다.

   이처럼 흐리기는 작가의 심리적 방어에 봉사한다는 면도 있지만, 관람자에게 즉각적인 감정 반응을 넘어 사유를 촉발한다는 면도 있다. 나치 군복 차림의 <루디 삼촌>(1965)<19771018>(적군파 그룹의 죽음을 그린 연작)처럼 다른 부차적 요소들이 흐려지는 반면, 청년의 미소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어째서 이 순수하게 생긴 청년이 살인마가 됐을까. 이들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는 또한 인간의 한계와 덧없는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흐리기는 또한 거리감을 넘어 아우라를 느끼게 한다. 사실 아우라는 거리감과 분리될 수 없다. 벤야민은 아우라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나타남이라 했다. 포토-페인팅의 흐리기에는 이런 구조가 있다. 모든 것을 사진처럼 그대로 제시하는 것 같지만 거리감이 있고, 그 거리감을 넘어 불현듯 다가오는 정서적 현현이 있다.

  우리는 그 그림을 본다고 믿고, 이해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흐리기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여기서 발생하는 아우라가 그림을 아름답게 만든다. 이 느낌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엠마> 1966)에서 절정에 이른다. 거의 신성함을 띠는 아우라가 있다.

   화가는 엘리(자베트)를 손수 카메라에 담아 그림으로 옮겼다. 처음으로 누군가’(작가미상)의 스냅사진 대신 작가 본인이 촬영한 사진을 사용한 것이다. 또 앞선 작품들의 회색 톤을 벗어나 처음으로 컬러로 그렸다. 황금빛이 감도는 신비스러운 색채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상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암울한 정서에서 벗어나 생생한 현실을 수용한다는 것. 말하자면 화가가 자신의 예술 활동을 통해 스스로 치유됐다는 것을 뜻한다. 결말부 쿠르트는 앞으로 컬러차트(색상 표) 작업을 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리히터가 작품에 날짜를 기록한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이로부터 일곱 달이 지나고, 1230베티가 태어난다. 공교롭게도 이모의 생일과 같은 날이다, 화가가 어째서 계단에서 내려오는 엘리(자베트)의 모습을 그토록 예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림은 임신 소식을 알리는 모습이다. 그녀의 임신은 화가와 가족의 드라마에 있어 첫 희망, 첫 승리의 소식이다. 화가를 짓누르던 운명에 대한 첫 반격이다.

   그림은 뒤샹에게 바치는 오마주를 초과한다. 하지만 영화 속 쿠르트는 평론가에게 이 의미를 밝히지 않는다. 또 영화는 이 그림을 황금빛에서 푸른빛으로 바꿨다. 그것은 엘리(자베트)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이라는 감독의 해석을 반영한다. 그림은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이 등장하는 마지막 작품이며,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모가 가스실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과 대비된다. 죽음과 삶, 부활이 대비된다.

 

내 그림은 나보다 현명하다

 

   영화 제목은 <작가 미상>이다. 정확히 말해 작가가 누군지 모른다기보다 작가가 없다는 뜻이다. 작가의 의식적 연출이 아닌 우연을 통해 진실에 접근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때 진실은 무의식, 자연, 역사 즉 과거의 기억을 아우른다. 리히터는 우연을 통한 진실의 탐구를 여러 번 말했지만, 이 언급처럼 단호한 것도 없다. “나의 그림은 나보다 현명하다.”

   한편 영어 제목은 이다(“눈길 돌리지 마”). 이 제목은 리히터 작품에 나타나는 흐리기의 발생 순간을 말해준다. 영화가 말하는 흐리기는 작가의 의식적 기법이면서도 무의식적 지각·기억에 닿아있다는 점에서 작가 미상개념과 모순되지 않는다.

   상당수의 미술 평론가들은 리히터의 포토-페인팅을 사진과 회화, 두 매체 간의 관계로 보려 한다. 가령 사진은 객관적이고 작가 미상적인데, 회화적 터치인 흐리기가 거기에 주관적 시선을 더한다고 본다. 하지만 리히터의 흐리기는 회화가 아닌 사진에서 나타나는, 사진 매체의 고유한 특성에서 온 것이다. 비록 없어야할 (카메라 초점의) 오류로 여겨지지만.

   따라서 사진-그림은 말 그대로 그림이자, 또 다른 의미에서 사진이다. 쿠르트는 기자에게 말한다. “저는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립니다. 사진도 찍고요. 다른 수단으로서요.” 사진-그림은 붓으로 그린 사진이란 이야기다. 여기서는 매체 간의 관계가 아니라, 한 매체 속에 공존하는 표현방식들의 관계가 중요하다. 선명함/흐릿함, 일상/신성.

   말하자면 흐리기는 한 매체 속의 리얼리즘과 추상의 공존, 겹침이다. 이때 한 매체를 그림으로 불러도 좋고, 사진으로 불러도 좋다. 리히터가 사진-그림으로 이름붙인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사진-그림에서 리얼리즘과 추상의 공존, 겹침 관계는 또한 작가의 무의식적 기억에 바탕을 둔다.

   쿠르트는 자신이 진실에 다가선다는 것을 모른 채 작업하며, 자신을 치유했다. 쿠르트는 끝내 그 사실을 몰랐다. 관객들만 그 사실을 안다(실제 리히터는 그 사실을 2002어느 가족의 드라마를 집필하던 위르겐 슈라이버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된다). 이처럼 영화는 작가의 삶, 무의식적 기억과 예술이 연결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 예술 세계는 우연을 활용한다는 면에서 작가 미상성격이면서도, 리히터의 공식 입장과 다르게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연결돼있다. 글 첫머리에서 영화가 심층적으로 복잡하고, 논쟁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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