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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 아메드> - ‘자아’라는 감옥의 탈출구2020-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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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년 아메드>: ‘자아’라는 감옥의 탈출구
2020.7.30(목)19:00 영화의전당 소극장
<소년 아메드>(Le Jeune Ahmed, 2019)는 종교적으로 ‘급진화’된 13세 소년의 변화를 그렸다. 2014년 5월 브뤼셀 유대인박물관에서 일어난 테러, 다음해 3월 브뤼셀 공항과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테러를 배경으로 이슬람 ‘광신도’들의 급진적 폭력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한 영화다.
다만 영화에는 빈 곳이 많다. 대표적으로 아메드가 어떻게 해서 광신도가 됐는지 설명이 없다. 아메드가 광신에서 벗어나는 과정도 엔딩에서 ‘갑작스런 전환’으로 나타난다. 영화 전개가 함축적이고, 관객들의 상상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 글은 영화의 빈 곳, 다시 말해 아메드의 성격과 행동을 추적하고 연결하며, 그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를 헤아려보려 한다.
• 카메라의 시선
아메드가 카메라 앞을 지나치며 계단을 빨리 올라간다. 카메라는 끝내 그를 놓친다. 관객들은 그가 화장실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조금 뒤에서야 알게 된다. 이 오프닝 장면은 영화 전체를 대표하는 표현 요소를 담았다. 카메라가 아메드를 놓치는 것처럼 아메드가 우리의 이해를 벗어난다는 것.
카메라도, 감독도, 관객도 전지적 시점을 가질 수 없으며, 인물을 완전히 알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영화가 다루는 급진화된 인물과 상황이 복잡하고, 수수께끼 같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관객들이 <소년 아메드>를 미스터리 영화처럼 보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이 같은 전지적 시점의 부재는 감독의 다른 영화에서도 거의 일관되게 나타나는 태도이며, 감독의 ‘타자 철학’을 반영하는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과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 ‘거리 두기’의 영향도 함께 생각할 수 있겠다).
카메라의 시선이란 측면에서 <소년 아메드>를 보면, 대체로 카메라가 인물 신체에 매우 가깝고, 인물의 등 뒤에서 따라간다. 바꿔 말해 카메라는 인물 신체에 너무 가깝기 때문에 인물 전체를 비출 수 없다. 인물의 행동을 바라본다기보다, 인물을 따라간다. 그러면서 인물이 그 행동의 외부가 아니라, 행동 장면의 내부에서 묘사된다.
여기서 카메라는 관객들이 인물과 심리적 거리를 두기 어렵게 만들며, 개입을 유도한다. 그야말로 신체적 근접성에서 관객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것이다. 다만 아메드의 성격은 심리적 동일시를 힘들게 만든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소년을 걱정하며 마음 졸이게 된다. 이 기묘한 긴장 관계는 또한 다르덴 영화의 특징일 것이다. 그런데 아메드와 심리적 동일시를 느끼기 어려운 것은 그의 문제적 성격뿐 아니라 그의 심리 자체를 알기 어렵다는 점에도 있다.
• 주인공의 시선, 관객의 시선
인물의 심리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인물의 얼굴이지만, 아메드의 얼굴 정면이 제대로 보이는 장면은 거의 없다. 주로 옆얼굴, 뒷모습, 뒷목이다. 이것은 심리 묘사의 관점에서 인물의 심리를 은폐, 차단한다. 관객 관점에서 인물의 이해가 방해받고, 지연되는 것이다. 클로즈업이 많지만, 인물의 이해를 돕진 않는다. <잔 다르크의 수난>(1928)과 같은 표현(계시)적 클로즈업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아메드의 얼굴은 대체로 무표정하고, 관객들은 그 얼굴에서 백지 같은 공허함을 느낀다. 그의 시선은 종종 아래쪽을 향한다. 카메라가 얼굴 정면을 비출 때도 그의 시선은 카메라를 벗어난다. 그 결과로 아메드의 얼굴과 온몸은 갑옷을 입은 것처럼 갑갑하게 보이고, 그의 안경마저도 자아의 보호구처럼 느껴지게 된다.
한 가지 예외는 아메드가 ‘이맘’(‘지도자’)을 볼 경우다. 이때는 ‘사람’의 표정을 하고, 똑바로 쳐다본다. 아메드는 그밖에 다른 사람들을 바로 쳐다보지 않는다. 그에게는 타인(타자)이 없다는 말이다. 감독은 이처럼 아메드가 자기 논리 속에 갇혀있다는 것을 그의 시선을 통해 가시적으로 표현한다.
한편 감독은 관객의 눈을 ‘엄마’의 눈으로 자리 잡게 한다. 관객은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의 눈이 되어, 아메드를 동정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시선을 갖게 된다. 영화가 전개될수록(아니, 영화가 끝난 뒤에도) ‘소년이 무슨 행동을 할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왜 광신도가 됐나’에 대한 관객들의 궁금증은 더해 간다.
그리고 궁금증은 조마조마한 심리 상태에 이른다. ‘아메드가 끝내 선생님을 해칠까’ 하는 물음 속에서 관객들은 <소년 아메드>를 스릴러 영화처럼 보게 된다. 이처럼 소수의 등장인물과 모티브로 이만큼 영화를 몰아갈 수 있는 것은 감독의 연출력 덕분이고, 이 연출에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시선(카메라, 주인공, 관객)의 배치에 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 인물 성격의 형성
13세는 가족을 넘어, 다른 것을 꿈꾸는 시기다. 다른 이상, 모델을 추구한다. 주변 환경에 불만을 느끼고, 자신을 경멸하는 한편, 다른 ‘거대한 것’에 속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다. 하지만 아메드는 이맘을 모델로 여기고, 광신의 길로 접어들었다.
광신은 이슬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종교, 정치 신념(진영논리)에서도 발생한다. 단지 감독이 주목하는 광신은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인류 보편 명제를 파괴하고,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비롯해 세상 어떤 것보다 스스로를 우위에 놓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어떤 반론도, 대화도 용납하지 않는 ‘폐쇄적 논리 구조’를 지닌다. 아메드는 말한다.
“[농장 사람들이] 너무 잘해주는 게 마음에 안 들어요.”
센터에 면회 온 엄마에게 아메드는 농장 사람들이 너무 잘해주기 때문에, 농장을 찾아가기 싫다고 말한다. 적(敵)은 적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미움에 기반 한 논리가 유지되려면 말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광신 논리다. 적이 적으로 유지돼야 자기 논리의 정당성이 유지되고, 상대를 ‘처벌’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가 ‘희생자’가 되고, 죄책감이 들 것이다.
아메드가 이처럼 폐쇄적인 논리를 지니고 광신도가 된 배경으로는 몇 가지 요소를 짐작할 수 있겠다. 첫째, 아버지의 부재. 어쩌면 이맘이 심리적 차원에서 아메드 아버지를 대체하는 역할을 맡았을 수 있다. 둘째, 자살테러로 죽은 사촌. 아메드가 그의 사진을 놓고 기도하는 걸 보면 두 사람이 서로 친했거나, 아메드가 그를 좋아했던 것 같다.
한 달 전만 해도 게임만 하던 소년이 갑자기 이슬람교에 깊이 빠진다는 것은 특히 사촌의 죽음이 계기가 됐을 가능성이 있다. 아메드는 ‘사촌이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그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종교 실천과 체험을 ‘따라 경험’해보려 했을 수 있다. ‘단순 모방’이라기보다는 철학적 해석학에서 ‘추체험’(追體驗 Nacherleben)으로 부르는 것 말이다.
셋째, 이네스 선생님이다. 아메드는 다섯 살 때부터 자신을 돌봐준 선생님을 엄마처럼 여겼을 수 있고, 선생님이 남자 친구를 사귄다는 걸 알자 배신감(?)을 느꼈을 수 있다. 그것도 유대인 남자란 점에서는 선생님이 이슬람 세계(아메드의 지역 공동체)를 버리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됐을지 모른다.
• 아메드와 타인들
이 같은 아메드에게는 타인이 없고, 이맘만 있다. 이 이맘은 사실상 차세대 테러 요원을 발굴하는 모집원이다. 그는 선/악, 순수/불순의 이분법적 언설로 권위를 얻고 있다. 아메드는 그 카리스마에 매혹되고, 그에게서 아버지를 대체하는 모델을 찾았을 수 있다. 이맘의 언설은 반론도, 대화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비이성적이고 감성적이다. 하지만 그만큼 소년에게는 유혹적일 수 있다.
반면 ‘센터’는 성격이 다르다. 영화 속 센터는 ‘탈급진화(déradicalisation) 센터’다. 2015년 연쇄 테러 사건들이 일어난 다음해부터 벨기에, 프랑스 등지에 설치됐고, 종교·이념적으로 급진화된 청소년의 교화를 목표로 한다. 명목상으로는 일방적 사회통합을 추진하는 곳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 운영은 영화가 묘사한 것처럼 꽤 자유롭고 민주적인 듯하다.
아메드가 센터에서 만난 사람들은 ‘교사’ ‘교육자’다. 자막이 ‘전담 사회복지사’로 옮긴 ‘1인 담당 교사’(éducateur de référence)도 있고, ‘상담 선생님’으로 옮긴 ‘철학 자문’(conseiller philosophique. 아메드의 아랍어 책과 그림에 문제가 없다고 밝혀준 인물)도 있다.
이들은 주로 ‘듣는 역할’을 할 뿐, 종교적 내용을 편향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그 대신 소년이 일상생활부터 스스로가 매사를 선택, 결정하기를 바란다. 이념, 교리에 따른 선택이 아닌 자발적 선택을 유도하고, 자유의지를 길러주려는 것이다. 종교적 광신과 세뇌에 맞서는 ‘기초체력’ ‘면역력’ 강화 훈련이다. 비록 영화 속에서 가시적 효과는 없었지만 말이다.
한편 아메드와 가장 친밀한 여성은 엄마, 누나, 루이즈, 이네스 선생님이다. 아메드에게 이 네 명의 여성은 ‘네 명의 적’이다. 아메드는 자신이 세운 순수함의 기준에서 이들이 불순하다고 여긴다. 말하자면 아메드는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살아가는 셈이다.
참고로 이네스 선생님의 ‘돌봄 교실’(école de devoirs, 과제 교실)은 ‘방과 후 학교’와 비슷하다. 5세에서 13세 학생을 대상으로 한다. 선생님이 아메드를 5세 때부터 돌봤다는 설정에 상응한다. 다르덴 형제도 2년 간(1993~1995) 돌봄 교실에서 아메드와 같은 북아프리카 출신 아이들에게 프랑스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영화는 이 경험을 반영한다. 감독의 거주지인 ‘세렝’에선 돌봄 교실을 ‘천재의 씨앗’으로 부르는데, 지난해 감독은 세렝에서 <소년 아메드> 상영으로 기금을 모아 이 교실에 기부했다. 감독이 돌봄 교실의 가치를 높게 본다는 말이다.
• 순수함의 강박
영화는 종교적 광신에 관한 물음을 순수함의 관점에서 구체화한다. 아메드는 어떻게 순수함의 이념에서 벗어나는가. 이 치환이 가능한 것은 광신이 곧잘 순수함의 강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감독은 순수함의 강박을 표현하는 계기를 세정(ablution)에서 찾는다(소년 배우를 캐스팅할 때도 소년이 세정하는 연기, 또 세정 직후 엄마를 거부하는 연기를 테스트했다).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몸을 씻는 행위는 인류 보편적인 것이다. 전혀 광신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광신의 징표는 아메드가 세정한 뒤 엄마의 포옹도 거부할 때, 또 루이즈와 신체 접촉을 했다고 세정하며, 개가 손을 핥았다고 세정하는 모습에서 나타난다. 아메드가 일상적으로 이네스 선생님을 비롯해 여자와 악수하지 않는 것도 이 연장선에 있다.
영화는 이처럼 종교적 광신이 소년의 신체를 통해 소년을 어떻게 통제하는지, 다시 말해 개인들을 어떻게 통제하는지를 보여준다. 급진주의는 소년이 다른 사람을 만지지 못하게 하고, 타인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 순수함을 오염시킬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소년을 바깥 세계와 격리시킨다.
소년의 강박적 세정은 강박적 기도와 연결된다. 말하자면 순수함에 대한 강박은 세상 어떤 일이 있어도 ‘지금, 여기서’ 이런 의식과 기도를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메드가 센터에 들어간 첫날, 기도 시간을 지키려다 교사들과 실랑이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소년이 이렇게 된 데는 이맘의 영향이 컸을 듯하다. 이맘이 소년에게 인터넷 영상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생전의 사촌이 밝게 웃고 있다.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의미로 후광을 넣었어.
네 사촌을 자랑스러워해도 돼. 믿음이 깊었거든.”
자막에서 ‘믿음이 깊었거든’이란 구절은 원래 대사에서 ‘순수한 사람’(un pur)을 옮겼다. 이맘의 말은 요컨대 종교적인 순수함이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만큼 우위에 있다, 즉 순수함이 죽음보다 강하다, 우월하다는 말이다. 이런 ‘가르침’을 통해 아메드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믿은 듯하다(혹은 그렇게 결심했거나). 이 믿음은 결말부에서 처참한 허상으로 드러나지만.
• 순수함의 상징체계
한편 이맘은 이네스 선생님이 노래를 통해 아랍어를 가르치려는 수업이 “배교에 신성모독”이라고 본다. 쿠란을 통해 아랍어를 가르쳐야 이슬람이 유지된다는 이유에서다. 이것 또한 ‘순수주의’의 한 형태다. 이맘은 이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라시드(아메드의 형)를 꾸짖는다.
“변절자와의 싸움보다 경기가 더 중요해?
이 망할 년의 목표가 뭐겠어?”
자막에서 ‘망할 년’은 원래 대사에서 ‘암캐’(chienne)를 옮겼다. 이맘이 생각하는 순수함의 상징체계를 엿볼 수 있다. 순수함은 죽음보다 우월한 반면, 불순한 변절자는 ‘개’다. 아메드가 농장에서 개와 접촉하기 싫어한 이유일 것이다. 아메드는 개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고, 개가 손을 핥자 곧바로 세정했다. 이런 모습은 이네스 선생님과 악수하지 않는 것과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같은 순수함의 강박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맘의 세뇌 때문인가? 이에 대해 장-피에르 다르덴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oui et non)고 답한다. 아메드도 자신이 유혹(세뇌)되도록 했다는 점에서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14세는 이미 책임을 생각할 나이”란 것이다(2020. 3. 3. AFVT ‘프랑스 테러 피해자 협회’ 초청강연).
• 순수함. 부서지기 쉬운
그럼에도, 순수함의 이념은 견고하지 않다. 아니, 순수함 자체가 부서지기 쉬운 것이다. 영화는 순수함의 상반된 경로를 보여준다. 하나는 폭력, 또 하나는 사랑이다. 아메드는 광신적 순수함에서 이네스 선생님을 공격한다. 반면, 농장에서 루이즈와 사랑을 속삭일 때는 잠시나마 종교적 순수함의 강박에서 벗어나, 보편적 의미에서 순수한 시간을 향유한다.
영화는 두 경로가 모두 부서지기 쉽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부서지기 쉽다는 것은 ‘변화 가능성’을 뜻하기도 한다. 아메드가 폭력의 길에서 벗어나고, 광신적 순수함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 여기에 감독이 생각하는 희망이 있을 것이다.
감독은 루이즈와 아메드가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살인을 향한 맹목적 돌진이 멈추는 시간이다. 카메라는 4분 동안 두 인물을 함께, 크게 잡는다. 이때 아메드는 혼자가 아니었다. 산들바람이 분다. 루이즈의 머리카락, 나무, 풀이 가볍게 흔들린다.
여기서 두 경로가 대비된다. 이처럼 연약하고 작고 아름다운 순간이 있는가 하면 살인, 단단함, 경직된 순간이 있다. 부드러운 풀잎이 있는 한편, 칼이 있다. 마치 두 사람이 함께 앉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나란히 앉은 모습이 있는 한편, 목표 달성을 위한 달리기가 있다(달리기는 상징적으로 ‘돌진’이지만, 실제 아메드는 여러 번 달리기를 연습한다).
루이즈와 함께 있을 때 아메드의 내면은 흔들리고, 마음이 열린다. 농장에서 들리는 소리는 평화롭고, 그야말로 자연스럽다. 소 울음소리, 새소리, 흙을 밟을 때 나는 소리, 멀리서 간간히 들리는 비행기 소리. 로베르 브레송의 음향 사용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자연주의 음악은 농장 가족의 친절한 성품과 함께 아메드의 긴장을 늦추고, 관객들을 이완시킨다.
소녀는 풀잎으로 소년의 뺨을 간질인다. 피부는 나와 타인의 경계다. 또 레비나스의 말처럼 피부는 “타인과 내 안의 타자성의 경계”이기도 하다(『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 소녀가 소년의 피부를 건드릴 때 소년의 내면에서,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던 또 다른 무엇, 타자성이 깨어났을 수 있다. 그 타자성은 소녀를 향한 것이고, 소녀가 불러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년의 마음은 열린다. 하지만 소년은 이 열림을 ‘죄’로 여기고, 그에 대한 원망의 화살을 느닷없이 이네스 선생님 쪽으로 돌린다. 소년은 센터로 가는 차에서 뛰어내려 돌봄 교실로 달려간다. 이처럼 급히 선생님을 공격하려는 것은 내적 변화에 대한 저항이다. 불순함을 없애려는 세정이며, 자신의 순수함을 증명하려는 행위다. 신에게 또는 자신에게.
나는 타락하지 않았어. 일순간 죄를 지었지만 내 마음은 순수해. 아메드는 선생님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죄에 대한 보상 효과를 기대한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하얀 리본>(2009)이 떠오른다. 순수함이란 굴레(강요)가 아이들을 잔혹하게 만든다는 면에서 말이다.
• 열린 결말
결말을 놓고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감독은 아메드의 성격상 타인의 영향으로 광신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고 봤고, 아메드 자신에게 일어나는 ‘뜻밖의 사건’을 통해 광신에서 벗어나는 결말을 생각한 것이다. 소년은 선생님을 해치려고 돌봄 교실을 찾아간다. 1층이 잠겨 있어 2층 창으로 들어가려다 그만 추락한다.
감독이 생각한 ‘뜻밖의 사건’은 강력한 신체 경험이고, 극심한 고통이었다. 아메드는 난생 처음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선생님을 죽이는 데만 골몰하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변화를 촉발한다. 이맘의 ‘가르침’과 달리 소년은 평온하지 않다. 이때 소년이 찾은 것은 이맘도, 알라도 아니었다. “엄마... 엄마...”
이로부터 아메드의 자아를 가두던 감옥의 빗장이 열린다. 그동안 소년을 가둔 것은 미움의 논리였고, 그 미움은 적극적, 공격적 에너지였다. 반면 타인을 해치기는커녕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는 현재 소년을 관통하는 것은 아주 연약하고, 수동적인 에너지다. 그런데 이 절대적 수동성 속에서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 소년은 엄마를 찾는다. 이것은 ‘여성 4대장=적’의 구도가 깨어졌다는 걸 말한다.
소년은 대지로 돌아왔다. 이것이 추락의 상징적 의미일 것이다. 자신(들)만의 순수함의 이념에 사로잡혔던 소년이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성 4대장 가운데 엄마에 대한 거부감이 무너지며, 선생님에 대한 거부감도 함께 무너진다. 소년은 선생님을 해치려고 준비했던 쇠꼬챙이로 안간힘을 다해 창살을 두드리며, 선생님을 부른다. 도구의 변화 가능성이 시적으로 표현된다. 소년의 변화 가능성과 병치된다.
선생님이 소년의 부름에 응답하며 나타나자 소년은 선생님의 손을 잡고, 용서를 구한다. “절 용서해주세요.” 화해와 용서는 감독이 자주 다루는 주제이지만 <소년 아메드>의 경우는 죽음의 고통과 연관된다는 점이 특별하다. 레비나스 철학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동안 다르덴 형제와 레비나스 철학의 연관성은 감독 본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는데, 논의의 초점은 주로 ‘타자’ ‘얼굴’ ‘대면’에 있었다. 확실히 <소년 아메드>에도 이런 요소가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번 영화 결말부가 레비나스 철학에서 ‘죽음’에 관한 주제와 연관이 깊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다르덴 형제가 이 주제를 중요한 모티브로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일 듯하다.
• 레비나스와 죽음
레비나스는 죽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죽음 앞에서의 극심한 신체적 고통과 연관시켜 생각한다. 이때 죽음이란 것은 인간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이고, 그동안 쌓아온 계획이 모두 무너지는 순간이다. 레비나스는 이런 상태를 ‘절대적 수동성’,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라고 표현한다. 죽음은 계획(설계)과 반대 지점에 있는 것이다.
가령 하이데거 철학은 인간이 언젠가 죽을 것이란 사실을 미리 받아들이고, 그 미래 시점에서 현재를 보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하면 삶의 태도가 바뀔 것은 분명하다. 현재 삶을 달리 보고, 다르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레비나스의 관점에선 반쪽의 진실이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가 끝내 ‘삶을 계획하는 인간’을 말하는 데 머물렀다고 본다.
레비나스는 그런 인간의 태도를 ‘존재의 코나투스’(conatus essendi)로 부른다(『윤리와 무한』). 삶의 연장, 존재의 지속(보존)을 향한 ‘노력’ ‘관성’을 말한다. 반면 레비나스는 죽음 앞에서 인간이 무너지고, 계획이 무산되는 점에 주목하며, 이 무너짐에 희망이 있다고 본다.
“희망은 죽음의 언저리에, 죽음의 순간에, 죽어가는 주체에게 주어진다.”(『시간과 타자』)
이때 죽음에 희망이 있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코나투스, ‘자아라는 감옥’의 무너짐을 말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이런 무너짐에 대해 ‘(자아의 집착을) 내려놓음’(放下着)이라고 말하고, 여기서 일어나는 삶의 전환을 ‘회향’(回向. 얼굴, 몸을 돌려 다른 쪽으로 향함)이라고 부른다.
레비나스는 이때 인간이 타인을 향한다고 말한다.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관계에 들어간다고 본다. 모리스 블랑쇼가 『문학의 공간』에서 말하는 ‘밤’ 또한 레비나스의 죽음과 비슷하다. 책은 톨스토이의 단편 『주인과 하인』을 음미한다(<니키타의 몸 위에 눕다>).
주인은 강한 생존력과 생존욕구를 갖춘, 자기중심적 코나투스의 인물이다. 하인의 삶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러나 주인은 하인과 눈보라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모든 노력에 실패하자 주인은 돌연 하인의 몸을 따듯하게 녹일 결심으로 하인을 껴안고, 죽어간다. 블랑쇼는 이것을 죽음과 대면한 주체가 타인과의 관계 쪽으로 열리는 사건으로 해석한다.
필자는 영화 엔딩에서 아메드가 선생님을 마주보고, 손을 잡는 모습에서 이 같은 레비나스 철학의 주제를 떠올린다. 비록 레비나스와 블랑쇼가 말하는 ‘타인에 대한 희생’이란 계기는 없지만, 적어도 죽음에 직면한 아메드가 자아의 붕괴에 이어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관계에 들어갔다는 면에서 말이다.
•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와 ‘딜레이’(Delay)
엔드 크레디트에는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이 들린다. 슈베르트가 삶의 마지막에 작곡했고, 그의 ‘방랑자’ 캐릭터가 절정에 이르는 작품이다. 영화가 이 곡을 들려주는 것은 인생을 ‘여행’ ‘방랑’으로 보는 세계관을 표현한 것이 아닐지. 아메드가 새 삶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는 것을, 타자로 열린 세계로 걸어간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 아닐지.
아메드는 이네스 선생님과 관계를 재설정하며, 자기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이때 이네스 선생님은 ‘성녀’ 성격을 지닌다. 다르덴 형제에게 영향을 많이 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소냐’, 다르덴의 <더 차일드>(L'enfant, 2005)에서 ‘소냐’, 그리고 브레송의 <소매치기>(Pickpocket, 1959)에서 ‘잔느’처럼 한없는 인내와 사랑을 보여준다.
아니, 이네스 선생님은 예수의 성격에 가까운 면이 있다. 본질적 선함이 타인의 공격(남용)을 받는 원인이 된다는 점, 또 자신을 미워하는 자에게도 사랑과 동정심을 가진다는 점에서.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1966)를 연상하게 한다(성경 상징에서 당나귀는 예수와 환유적으로 연결된다). 당나귀가 죽어가는 엔딩에는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0번이 들린다.
분명 13세의 소년에게는 변화 가능성이 있지만 실제 소년이 변화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영화 속 유일한 삽입곡인 <딜레이>(Delay)는 지연, 연기, 연착을 뜻한다. 소년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소년이 바뀌는 걸 보려면 아직 기다려야 한다, 여기엔 인내와 사랑이 필요하다.
영화는 죽음의 고통을 변화의 계기로 설정했지만, 그런 변화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 곁에 센터 교사, 루이즈, 엄마, 그리고 이네스 선생님 같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메드는 바뀌지 않았을 수 있다. 삶의 태도를 바꿔주는 타자, 새 삶을 발견하게 해주고, 삶에 대한 사랑을 불러주는 타자 말이다.
이런 타자의 역할은 바로 다르덴 감독이 생각하는 예술, 영화의 역할이기도 하다. 장-피에르 다르덴의 말처럼 예술은 ‘[타인에게] 내민 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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