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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페이 스토리> - 균열하는 도시 : 풍경과 심경201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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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페이 스토리> - 균열하는 도시 : 풍경과 심경
2019.11.14.(목) 19시 영화의전당 소극장
<타이페이 스토리>(靑梅竹馬, Taipei Story, 1985)는 전환기 타이베이를 살아가는 도시인의 소외된 삶과 사랑의 파편들을 만화경적으로 구성한 영화다. ‘만화경적’이란 것은 색유리 조각들이 실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한데 모여 형상을 만들어내듯 영화에서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인 인물 설정과 서사가 어우러져 모호한 형세를 이룬다는 뜻이다. 엔딩 장면, 건물 유리창에 비친 도시 이미지처럼 말이다.
영화에는 표준중국어(國語), 타이완어(台語), 일본어, 영어를 비롯해 여러 가지 언어가 들린다. 주인공 아룽도 자주 타이완어로 말한다. 이것은 타이완 역사뿐 아니라 감독 개인사의 복잡함과도 연관이 있다. 감독은 1947년 상하이에서 태어나 1949년 타이베이로 이주한 외성인(外省人)이다(주연을 맡은 허우 샤오시엔은 감독과 동갑이고, 그 또한 외성인이다).
감독은 일본 만화, 미국 팝송, 유럽 예술영화, 그리고 미술과 클래식 음악으로 성장기를 보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건축학과를 가려 했지만, 아버지의 만류로 전기공학을 전공한다. 1970년 미국 유학을 떠나 10년 간 학업과 직장 생활을 계속하며 미국 시민권을 얻은 뒤 타이완에 돌아온다. 우리에게 양덕창(楊德昌)보다 에드워드 양으로 더 알려진 이유일 것이다.
감독은 단편영화 <세월 이야기>(光陰的故事, 1982)를 발표한다. ‘타이완 뉴 웨이브’의 서막이다. 영화를 만든 감독 네 명 가운데 세 명이 해외 유학파란 사실은 타이완 뉴 웨이브의 국제적 감각을 짐작하게 한다. 그 뒤로 이어지는 장편영화 <해변에서 하루>(海灘的一天, 1983), <타이페이 스토리>, <공포분자>(恐怖分子, 1986)는 감독의 ‘도시 삼부작’으로 불린다. 감독은 1986년, 39번째 생일에 젊은 영화인들과 함께 ‘타이완 새 영화’ 선언문을 작성하며, 국가 선전영화나 상업영화가 아닌 ‘또 다른 영화’의 길을 밝힌다. 영화가 ‘의식적 창작 활동’ ‘예술 형식’이 될 수 있고, ‘반성과 역사의식이 있는 민족문화활동’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생각은 <타이페이 스토리>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 영화의 배경
1980년대 타이완 산업은 국영기업 중심에서 민영기업 중심으로 변한다. 타이완 경제의 핵심인 하청 산업은 중소기업 중심에서 대기업 중심으로 바뀐다. 영화에서 ‘안경 쓴 남자들’이 회사를 인수하고, 여주인공이 실직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시기 타이완은 외교적으로 고립됐다. 1971년 UN 탈퇴와 1979년 미중 수교(미국과 타이완의 단교)는 결정적이었다. 타이완이 소년 야구단의 국제 활동을 응원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타이완 입장에서 야구는 전 지구적인 스포츠이자 지역적인 스포츠였다. 지구적이란 말은 야구를 통해 국제무대에 진출할 수 있다는 뜻이고, 지역적이란 말은 식민지 시대 일본에게서 야구를 배웠고 해방 이후 미국의 영향 아래 야구가 발전했다는 뜻이다. 야구는 중국 대륙에는 없고 타이완에만 유행한 스포츠였다. 1968년 국가대표 소년야구단인 홍엽(紅葉)이 일본을 꺽은 것은 상징적이다. 일본에게서 배운 야구로 일본을 이긴 것이다.
소년 야구단은 여세를 몰아 이듬해 미국 윌리엄스포트 국제대회에서 우승한다. 1969년 아룽과 그의 친구 킴(欽)이 참가한 경기다. 그 뒤로 타이완은 이 대회에서 17승을 거두며 최다 우승국이 된다. 정부와 국민이 소년 야구단을 얼마나 성원했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영화는 식민지 시대 이후의 문화, 즉 ‘포스트 콜로니얼’(post-colonial) 문화와 지구적(global) 문화를 함께 담고 있다.
아룽의 단골집인 ‘긴자(銀座) 가라오케’ 사장이 일본어를 하며, 일본인 손님이 노래하는 모습, 야구 코치인 라이상 선생님이 도쿄에서 온 외손자에게 유창한 일본어로 말하는 모습은 식민지 역사의 요소다. 한편 후지필름 광고판을 비롯해 영화 결말부 미스 메이가 미국 컴퓨터 기업과 합작 회사를 세우는 내용은 지구화 시대의 요소다.
영화는 전통 가부장 문화도 그린다. 수첸 아빠는 식탁 아래로 숟가락이 떨어지자 양해도 구하지 않고 딸의 숟가락을 가져간다. 감독이 한 마디 대사도 없이 가부장 문화를 그려낸 장면이다. 또 영화는 국가주의와 청년문화를 담았다. 계엄령, 야간통행금지를 어기고 오토바이족이 총통부와 경복문 대로를 질주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물론 불법촬영이다). 총통 탄신일을 기념하는 장식 아래 오토바이 헤드라이트가 빛난다.
영화는 또한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긴장을 담았다. 엔딩 장면, 창에 비친 도시 이미지는 상징적이다. 자동차와 마천루가 모더니즘이라면, 그것이 일그러지는 이미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모던의 한계를 인식하고 ‘모던 이후’를 생각하니 포스트-모던적인 것이다. 도시 해부란 관점에서 감독의 도시 삼부작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작품과 비교되지만, 양(楊) 감독은 이렇듯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대면, 병치함으로써 좀더 ‘지금 시대’ 문제의식을 담았다.
• 풍경과 심경의 일치
영화는 이처럼 전환기 타이베이를 다각도로 접근했다. 이에 상응하는 인물들이 정교하게 구성되고, 이들이 남녀 주인공을 중심으로 두 개의 축을 이루며 교차되는 서사 구조다. 서사 전개는 대사, 행위보다 이미지가 중심이다. 특히 인물의 배경, 풍경으로 인물의 심리를 그린 장면이 많다. 이때 외적인 풍경(Landscape)은 인물의 심경(心景=Mindscape)과 분리되지 않는다. 감독은 ‘풍경과 심경의 일치’란 형식으로 도시 소외의 예술 형식적 탐구를 시도한다.
영화 풍경은 강렬한 대비를 표현한다. 변증법의 ‘정반합’으로 말하면, 정에 대한 반만 있고, 합이 없다. 자체 발광하는 광고판이 세워진 빌딩이 있고,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을 받을 때야 그 일부가 드러나는 구도심 디화제(迪化街)의 오래된 건물이 있다. 고층 빌딩에서 내려다보는 거리 풍경이 있고, 인물 눈높이에서 지면을 걸어가며 마주하는 거리와 시장이 있다.
수첸의 아파트와 수첸의 옛집, 수첸이 일하는 현대적 사무실과 아룽의 터전인 디화제 포목점, 퍼브(Pub)와 가라오케, 다트와 야구. 아버지 세대와 동생 세대, 또는 정신적으로 아버지 세대와 친할 정도로 늙은 아룽과, 여동생 ‘링’의 친구들과 친할 만큼 젊은 수첸. 라이상 선생의 오래된 집과 청년들이 무단 점거한 빌딩 공간. 아룽의 애창곡인 ‘온천장의 기타’(엔카 ‘온천장 엘레지’ 1948의 번안가요)와 수첸 방에 걸린 ‘1983 몬터레이 재즈 페스티벌’ 포스터.
이런 대비는 남녀 주인공의 균열로 귀결된다. 수첸 침상 위에 걸린 무용 사진은 그 균열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오브제다. 사진 속 여자 무용수는 남자 무용수의 두 팔에 안겨 윗몸을 한껏 뒤로 제쳤다. 아롱은 사진 속 남자의 손에 자기 손을 겹쳐 보고, 자신이 훨씬 작다는 걸 확인한다. 이것은 수첸과의 ‘문화 차이’를 실감하고, 왜소함을 확인하는 모습이다. 더는 수첸을 떠받쳐줄 수 없고, 감당할 역량이 없다는 말이다.
영화 후반부 수첸은 여동생 친구들과 지내다 혼자 집에 돌아와 미스 메이에게 전화를 건다. 앞날을 걱정하며 직장을 알아보는 전화다. 이때 무용수 사진의 유리 액자 위에 창문의 반영이 겹쳐지며 여자 무용수의 어깨와 머리가 창밖으로 나간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든다. 이것은 수첸의 정신적 외출, 균열을 표현한다.
• 건축적 표현
한편 영화가 대비와 균열의 풍경을 묘사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건축이다. 감독은 건축의 관점에서 디화제 상가를 그리는데, 1930년대 발터 벤야민의 ‘파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떠올리게 한다. 벤야민이 파리에 왔을 때 아케이드는 이미 생명력을 잃고 화석처럼 남아있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을 받을 때에야 자신의 일부를 드러내는 구도심 건물 또한 타이베이의 과거에 대한 파편적 기억과 인식에 상응한다.
달리 말해 수첸 아빠와 아롱이 옛이야기를 하며 바라보는 건물 외벽은 과거의 파편을 보여주는 극장이고, 영화관이다. 불빛이 비치는 그 짧은 지속시간 동안 옛이야기를 펼쳐 보이다가 뒤로 사라지니까 말이다. 감독은 건축가의 눈으로 도시를 보고 영화를 만든 걸까. 아니면 영화의 눈으로 건축을 본 걸까. <타이페이 스토리>에서 두 시선을 분리하긴 어렵다. 앞에서 감독 개인사의 복잡함을 말했지만, 특히 흥미로운 것은 건축에 관한 것이다. 이 영화는 그의 작품 가운데 건축적 요소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감독은 원래 건축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컴퓨터공학으로 대학원을 마치고, 건축 사무실에서 잠시 일하며 하버드 대학원 건축과에 지원해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끝내 건축가의 길을 가진 않았다. 그럼에도 감독의 영화에는 건축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있다.
어쩌면 영화 연구자인 ‘리오 첸’(Leo Chanjen Chen, 陳昌仁)의 표현처럼 ‘좌절된 건축가’인 감독이 영화를 통해 건축가의 꿈을 실현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감독은 건축적 프레임을 구획, 분리, 대비의 표현 수단으로 사용한다. 오프닝 장면, 남녀가 두 개의 유리문이 만드는 프레임으로 나뉘어 서있는 모습은 두 사람의 정신적 분리를 보여준다.
이 구획, 분리, 대비에 관해서는 사무실 블라인드도 활용된다. 수첸의 칸막이 블라인드는 세로로 설치됐고, ‘커’의 칸막이 블라인드는 가로로 설치됐다. 이 대비는 수첸이 실직하고 커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극명하다. 남자는 실내 칸막이의 가로 블라인드 뒤에 서있고, 수첸은 바깥 창의 세로 블라인드 앞에 서있다. 같은 공간에 서있는 두 사람이 가로와 세로로 대비, 분리된 것이다.
한편 남녀가 가로 블라인드 사이를 살짝 벌리고 ‘안경 쓴 남자’들을 훔쳐보는 장면에서는 블라인드의 균일한 평행선이 일그러진다. 이 ‘흔들리는 기하학’은 불확실한 미래에 상응한다. 일자리, 그리고 자신들의 관계에 관한 불안감 말이다. 수첸이 문틀에 서있는 장면이 많다는 점도 주목해보자. 문은 두 세계의 사이에 있다. 수첸이 문턱에 선 모습은 문틀=프레임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를 표현한다. 빌딩 회전문 앞에서 아룽을 기다리는 모습, 아룽이 집안에 있는 걸 보고 문턱에 선 모습. 모두가 프레임에 끼어있는, 갑갑한 느낌을 준다. 어떤 때는 문이 아닌 것도 문 역할을 한다. 수첸 아빠가 식사할 때 카메라는 술병 사이로 수첸을 비춘다. 술병은 문틀 역할을 하며, 수첸이 술꾼 아빠의 억압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죽은 시간’(temps mort)
건축적 프레임과 연관해 ‘죽은 시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은 시간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언급할 때 등장하는 개념이다. 인물이 프레임에 들어오기 전, 또는 프레임에서 나간 뒤 한참 동안 카메라가 공간을 비추는 것을 말한다. 대중영화에서 죽은 시간은 프레임에 들어온 인물과 사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안토니오니와 양 감독의 경우는 다르다. 오히려 물리적 환경의 무게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전반부 수첸과 커가 사무실에서 회랑으로 걸어 나오는 장면을 보자. 수첸의 대사만 들리는 가운데 카메라는 텅 빈, 커다란 건물의 회랑을 비춘다. 두 사람이 화면 왼쪽 귀퉁이에 산수화 점경인물처럼 나타나려면 10초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 10초의 죽은 시간은 커다란 건물의 회랑을 보여주며 거대 회사 조직, 그 프레임의 위엄찬 모습을 부각시킨다. 인물들이 회사 조직과 사회적 압력에 압도됐다는 사실을 순수한 시각 공간으로 드러낸 것이다. 죽은 시간은 서사 전개를 늦추며, 감독의 ‘초연한’ 시선을 느끼게 한다. 이 영화에서 장면 연결이 끊어진다거나 서사가 멈추는 인상을 받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 느낌은 감독이 의도한 결과이다. 파편들로 이뤄진 성좌, 즉 도시인의 삶의 파편들을 통해 모호한 형세의 이미지를 구성한다는 ‘벤야민’적 철학의 연장선에 있는 듯하다. 위 장면에 이어 수첸과 커는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시 설계(계획)자에게 전형적인 조감 시선이다. 카메라는 방향을 돌려 도로를 내려다보는데, 아룽이 운전하는 모습이 나타나려면 16초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 이 죽은 시간은 부감으로 대로를 비추며, 대도시의 번잡함을 인지시킨다. 아롱의 자동차는 그 많은 차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카메라는 아룽을 눈높이에서 정면으로 비춘다. 이 수평적인 시선은 일상적으로 도시를 살아가는 생활인에게 전형적인 것이다(수첸은 여러 차례 조감 시선을 보여주지만, 아롱은 주로 수평적 시선을 보여주며, 가끔 앙각 시선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처럼 죽은 시간을 연속적으로 활용한다. 죽은 시간은 프레임의 물리적 틀 자체를 부각하고, 그 틀을 인지하게 만들며, 인물의 외적 환경을 강조한다. 달리 말해 인물은 외적 환경에 압도되고, 지배당하고 갇혀 있다. 영화는 여러 번 ‘제자리 운동’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인물들이 각자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상황에 상응한다.
• 제자리 운동
수첸 여동생이 가져온 ‘펩시 캔’ 장난감은 책상 위를 움직이다 책에 걸려 제자리걸음을 한다. 그러다 움직임을 멈춘다. 수첸 집에서 링의 친구들이 밥을 먹다 저글링 장난을 한다. 한 친구는 젓가락으로, 다른 친구는 프라이팬 음식을 뒤집듯 밥그릇의 밥을 뒤집는다. 이때 아룽은 수첸 집에서 나가고, 수첸은 커의 전화를 받는다. 모두가 제자리 운동의 변형이다. 제자리 운동은 프레임에 갇힌 인물의 상황에 상응한다. 아룽/수첸의 관계, 수첸/커의 관계는 진전이 없이 언제나 제자리걸음이다. 나중에 수첸은 링의 친구인 ‘아비’와 볼펜으로 비슷한 놀이를 하는데, 두 사람의 관계 또한 아무 진전도 없이 맴돈다. 영세업자인 수첸 아빠도 불량 물품을 수출하다 클레임에 걸려 빚에 쪼들린다. 사채업자는 그에게서 받은 수표가 “세 번이나 거절당한 수표”라고 말한다. 그의 삶도, 수표도 제자리 운동을 하는 것이다. 도쿄에서 고바야시와 이혼하고 돌아온 ‘관이’는 아룽과 함께 초등학교 운동장을 찾아 그네를 탄다. 그네는 앞뒤로 왔다 갔다 제자리 운동을 한다. 관이는 아룽이 자기보다 수첸에게 더 신경을 쓴다고 불만을 표시한다. 그러자 아룽은 말한다. 영화 자막은 “네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 나랑 고바야시 중에 저울질하다가 그 사람과 결혼했으면서.”로 번역했지만, 좀 더 정확하게 옮기면 의미가 다르다.
“네가 나랑 결혼했든, 고바야시랑 결혼했든, 결과는 같았을 거야(都會是這種結局).”
관이가 누구랑 결혼했어도 파국을 맞았을 거라는 뜻이다. 제자리 운동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자 관이는 작심한 듯 말한다.
“세상은 더는 네가 야구를 할 시절(時候)과 같이 단순하지 않아.”
자막은 “세상은 야구 플레이처럼 단순하지 않아”로 번역했지만, 실제 비교 대상은 ‘야구와 현실’이 아니라 ‘과거 사회와 현재 사회’다. 시대가 변했다는 이야기다. “너만 남았어.” 아롱은 자신의 프레임 속에 머물며 시대 변화를 따르지 않는다.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 후렴구처럼 ‘시간은 가고, 나는 멈춘다’는 성격이다. 관이의 ‘너만 남았다’는 언급은 결말부와 공명한다. 오토바이가 택시를 따라오자 아룽은 잠시 택시에서 내리려 하는데, 운전사는 그곳을 떠나려 한다. “먼저 가면 안 될까요? 요즘 세상(外面)이 하도 혼란스러워서요.” 운전사 또한 시대 변화를 말한다. “네, 가세요.” 아룽만 남는다.
• 닫힌 거울
인물들은 각자 프레임에 갇혀 제자리 운동을 하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내가 뭘 원하는지 당신은 몰라.” “넌 [아버지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 “그건 네가 [수첸을] 몰라서 그래.” “아직도 나를 그렇게 몰라?” 상당수의 등장인물이 불통 상태다. 수첸 엄마조차 딸에게 고민을 털어놓지 않는다. 감독의 ‘시그니처 스타일’인 창-거울의 반영 이미지는 이런 ‘자기 폐쇄성’과 조응한다. 유리창에 인물의 모습과 외부 풍경이 겹쳐지는 이미지 말이다. 일반적으로 유리창은 내부와 외부의 소통을 위한 용도로 생각되지만, 이 경우는 외부 풍경과 내부 인물이 모두 유리 표면으로 수렴되고, 닫힌다. 이 창-거울은 외부로 열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닫혀있다. 외적 풍경과 내적 심정이 뒤섞이며 ‘풍경과 심경의 일치’를 물리적으로 실현한다. 엔딩 장면 유리창에는 일그러진 도시와 수첸의 모습이 겹쳐진다. 이 이미지 앞에서 수첸은 선글라스를 꺼내 쓴다. 출구가 없는 상황을 대면하지 않으려는 몸짓이다. 수첸은 이미 커에게 이런 인생관을 밝혔다. “난 비관적인 태도가 싫어. 그럼 스스로 슬픔에 빠지게 되잖아.” 선글라스는 이 회피를 위한 도구다. 수첸은 자신의 프레임 속에 머물고, 프레임을 지킨다.
프레임에 갇힌 사람은 고독하기 마련이다. 영화는 빈 방에서 시작해 빈 방으로 끝난다. 수첸 방에는 ‘빈 방’ 사진과 ‘빈 배’ 그림이 걸렸고, 빈 의자가 놓였다. 아룽은 늦은 밤에 빈 도로를 걷는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의 말처럼 도로는 비장소(non-place)다. 지나가기 위한 공간일 뿐, 거주하는 장소가 아니다. 빈 방, 빈 배, 빈 의자, 빈 도로는 내적 공허함을 표현한다. 인물들이 역설적으로 각자의 프레임에서 벗어나기를 꿈꾸는 이유다.
• 탈(脫)프레임
수첸은 아버지와 직장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결혼과 미국 이민을 꿈꾼다. 하지만 결혼과 이민은 현실성이 약하다. 그런 가운데 수첸은 일탈적인 행동으로 프레임을 벗어나려 한다. 실제 여동생과 그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수첸의 이미지는 문=프레임에서 벗어난다. 빌딩 옥상, 총통부 대로(오토바이 질주), 바다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공간들은 수첸을 가두는 프레임이 없다는 점에서 탈프레임 공간이다.
그런데 아룽에게는 시대 변화에 맞추려는 노력도, 결혼과 이민도 헛된 것이다. “결혼도, 미국도 만병통치약은 아냐. 그저 잠깐의 희망이지.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환상 같은.” 이미 시대는 변했고, 자신은 새 시대에 맞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룽은 수첸을 좋아하는 청년 ‘아비’에게 말한다. “끝난 것은 끝난 거야.” 아룽은 이처럼 현재 세상의 프레임을 환상으로 여기고, 그 허망함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새 삶을 재구성하려 한다.
한편 여동생과 그의 친구들 또한 탈프레임을 꿈꾼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유목민적(nomadic) 탈프레임을 보여준다. 빌딩 공실을 차지하는 ‘무단 공간점유’(Squat)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흐린다. 또 총통부 앞의 ‘금지된 영토’를 질주하는 것은 말 그대로 탈영토적이고, 탈프레임적이다. 아비가 아롱의 존재를 알면서도 수첸을 좋아하는 것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이들은 유희적이다.
수첸과 아룽은 어쨌거나 프레임을 진지하게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탈프레임을 고민했다. 거기서 벗어나거나, 또는 파괴하거나. 하지만 이들은 프레임을 무시하고, 자유롭고 즐겁게 프레임을 넘나든다. 여동생이 낙태에 관한 이야기를 해맑게 털어놓는 것도 이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수첸과 아룽이 ‘상상적 탈프레임’과 ‘파상적(상像을 파괴하는) 탈프레임’을 꿈꿨다면, 이들은 유목민적 탈프레임을 실행했다.
서사 전개에서 이들의 비중은 남녀 주인공에 비해 작지만, ‘타이페이 스토리’란 제목에 걸맞은 ‘도시 탐구’의 관점에선 비중이 크다. 현대 도시에서 청년문화=유목민적 요소는 남녀 주인공의 일에 곁다리로 끼어드는 일회적 요소가 아니라 지속적 요소다. ‘모더니즘 이후’를 이끌 세대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룽이 아비의 손에 최후를 맞는 것은 상징적 세대교체가 아닐까. 이 문제를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관해서 생각할 수 있다.
• 운명론 또는 포스트모더니즘
아룽의 비극적 사건은 커의 운명론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일들 때문에 점점 더 운명을 믿게 되는 것 같아. … 작은 편차가 치명적인 오류를 만들잖아.” 누구도 아룽과 아비의 어색한 만남이 그런 결과를 낳으리라 예상하진 못했을 것이다. 커의 말에서 ‘운명’이란 단어를 ‘우연’으로 순화하면, 이 문제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된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지정학적 미학』(1992)에서 감독의 <공포분자>를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영화로 보며, 흥미로운 개념을 제안했다. 그것은 “동기화된 단자들의 동시성”(synchronous monadic simultaneity)이다. <공포분자>에서는 한 20대 여자의 장난전화가 남녀 주인공을 혼란 속으로 빠져 들게 한다. 그들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아룽의 경우도 비슷하다. 아룽과 아비는 그날 밤 수첸 집 앞에서 마주치기 전까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아룽이 던진 몇 마디 말을 계기로 아비의 오토바이 헤드라이트는 붉게 빛나고, 두 사람의 폭력은 단계적으로 증폭한다. 마침내 아룽의 부상을 알아채고 승차 거부를 하는 택시의 몰인정으로 사건은 끝을 맺는다.
이 사건은 제임슨의 말처럼 우연하게 ‘동기화된 단자들의 동시성’이 빚어낸 결과가 아닐까. 누구 한 사람만의 잘못이라기보다 현대 도시민 각자에게 습관적인 삶의 행태가 길에서 조우하며 빚어진 결과로 보인다는 말이다. 아롱, 아비, 택시 운전사는 각자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아롱과 커 또한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커는 도시 건물들을 보며 말했다.
“이 건물들을 봐. 점점 더 구분하기 어려워져. 어떤 게 내가 설계한 거고, 어떤 게 아닌 건지 전부 똑같아 보여. 내가 있든 없든 점점 더 무의미한 것 같아.” 커와 아룽은 살아온 배경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만,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아룽은 익명성과 비장소를 대표하는 공간인 도로 위에서 사라져갔다. 길가에 버려진 폐품의 처지로 전락하고, 공중에 흩어지는 담배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두 사람은 무의미함과 익명성과 연관해 ‘동기화된 단자들의 동시성’을 보여준다.
• 그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
아룽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길에 버려진 TV에서 나오는 흑백 뉴스 영상이었다. 영상은 소년야구단의 국제대회 우승과 그 주역들을 알려준다. 모두 1969년 팀의 선수들인 걸로 봐서 1969년 당시 영상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우승기에 적힌 연도가 ‘1989’다. 또 뉴스는 “1969년 이후 월드 챔피언십을 탈환”했다는 기이한 멘트로 마무리한다. 이처럼 영상은 1989년으로 설정된 뉴스에 1969년 내용을 넣고, 미래 형식에 과거를 포함했다.
이 영상은 과거인가, 미래인가. 이 같은 ‘과거와 미래의 동시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간이다. ‘동기화된 단자들의 동시성’을 다시 들먹이자면, 1969년 우승과 1989년 우승은 직접 연관이 없는데도 두 사건은 동기화되어 동시 발생하는 것이다.이 환상 속에서 두 사건이 동기화되는 이유는 뭘까. 아룽은 과거 또는 현재의 의미가 미래에 드러나고, 미래와 조응할 걸로 본 듯하다. 물론 그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아직 존재하지 않고, 표상될 수 없는 미래와 조응해 과거·현재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미래를 모르면서 미래에 조응한다? 장-프랑수아 리오타르가 말한 ‘전미래 시제의 역설’을 떠올리게 한다. 프랑스어의 전미래는 영어 미래완료와 같이 미래 형식에 과거완료를 포함한 시제다. 미래 어떤 시점을 기준으로 그때까지 어떤 일이 ‘완료’ ‘경험’ ‘계속’되는 상황을 표현한다. 리오타르가 말하는 역설은 이것이다. 전미래 시제로 사고할 때 현재를 움직이는 기준은 미래에 있고, 그런 한에서 과거·현재가 완료되는 것은 미래 속에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를 모른다. 미래의 성격도, 기준도 모른다는 말이다.
아룽도 미래를 모른다. 하지만 그 알지 못하는 미래에 맞춰 과거·현재를 조율하고, 재구성하려 한다. 결말부 아룽은 수첸을 떠나며 말한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생각을 정리해야 돼.” 그는 현재 세상의 프레임을 환상으로 여기고, 미지의 미래에 조응해 과거를 재해석하려 한다. 어쩌면 현재에 뿌리내릴 수 없는 그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지 모르겠다. 그 선택이 미래와 과거완료의 동시성으로 나타난 것 같다.
그런 한편 수첸이 본 것은 건물 창에 비친 도시의 일그러진 모습이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동시성이었다. “어려울 것 같아요. 그 사람은 아직도 결정을 못 내렸어요.” 불확실한 미래에 따라 현재도 불확실하다. 아룽의 경우, 불확실한 미래가 오히려 현재에 희망을 주지만, 수첸의 경우는 현재의 불확실함을 더해줄 뿐이다. 수첸은 선글라스를 꺼내 쓴다.
이처럼 영화는 끝내 균열을 봉합하지 않았다. <도쿄 스토리>(1953)가 청년 세대가 어른 세대를 버린 이야기라면 <타이페이 스토리>는 어른 세대가 청년 세대를 버린 이야기다. 실제 1985년부터 타이완의 거시적 경제 지표는 매우 좋았고, 국민총생산은 두 배로 성장한다. 다만 영화는 그 전환 과정의 뒷면을 미시적으로 살폈다. 미시적인, 즉 우리들의 모습을 살핀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아룽처럼 당시 타이베이를 폐허로 보며, 그 잔해의 파편 이미지를 성좌로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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