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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 '신화적 언어와 사랑'2019-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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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신화적 언어와 사랑'
2019.3.7(목) 19:00 영화의전당 소극장
영화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Sueño en otro idioma, 에르네스토 콘트레라스 Ernesto Contreras 감독, 2017)는 마지막 시크릴 족 두 남자의 삶을 통해 소수 문화의 가치와 비애를 그린 영화다. 구성적인 면에서 영화는 복층 구조다. 언어학자인 마르틴(Martin)이 멸종 위기의 언어를 보존하려고 애쓰는 과정이 한 축을 이루고, 두 시크릴 남자의 사랑과 갈등이 또 다른 축을 이룬다.
그리고 두 축의 바탕에는 소수 문화와 주류 문화의 갈등이 깔려 있다. 이 갈등 또한 복층 구조다. 과거의 멕시코 원주민과 정복자 스페인 간의 문화적 갈등이 한 축이라면, 현재의 멕시코와 미국 간의 문화적 갈등이 또 다른 축이다. 두 가지 갈등이 과거와 현재에 복층으로,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먼저 과거의 세대를 대표하는 것은 두 남자 주인공인 에바리스토(Evaristo)와 이사우로(Isauro)이다.
에바리스토는 ‘스페인화’된 시크릴이고, 이사우로는 전통을 고수하는 시크릴이다. 또 에바리스토가 스페인어와 시크릴의 이중 언어(bilingual) 사용자인 데 비해 이사우로는 시크릴 단일 언어(monolingual) 사용자이다. 그리고 이 언어 사용의 차이는 성적 경향의 차이에 상응하는데, 에바리스토가 양성애(bisexual) 양상인 반면 이사우로는 동성애(homosexual) 양상으로 나타난다.
현재의 세대를 대표하는 것은 언어학자인 마르틴과 마을 여자인 유비아(Lluvia)이다. 마르틴이 멕시코 전통 언어를 지키려고 애쓰는 인물인 반면 신세대인 유비아는 영어를 습득해 미국으로 이민가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주목할 점은 현재 세대의 문화 갈등이 멕시코와 미국의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이고, 이때 멕시코는 원주민 요소와 스페인 요소가 결합한 혼성 문화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이 관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마르틴’이란 이름이다. 감독이 의식적으로 채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멕시코 최초의 혼혈 메스티소인 마르틴 코르테스(Martín Cortés “el Mestizo”, 1523~1595)를 떠올리게 한다. 마르틴은 스페인 출신의 정복자인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와 원주민 여인 말린체(La Malinche doña Marina)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 마르틴, 멕시코의 정체성
먼저 말린체란 인물을 생각해보자. 그녀는 1500년경 아스텍 권역인 베라크루스 주 코아트사코알코스(Coatzacoalcos) 인근에서 부족장의 딸로 태어나, 마야 권역인 타바스코 지역에 노예로 팔려갔다.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베라크루스로 들어왔을 때 마야 부족은 화평을 제안하는 뜻으로 먹을거리와 함께 스무 명의 여인을 선물로 줬는데, 여기에 그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말린체는 어학 천재였다.
이미 아스텍 언어인 나와틀(Nahuatl)과 마야 언어에 능통한 그녀는 단기간에 스페인어를 익혀 통역사를 맡았고, 에르난 코르테스의 최대 자산이 된다. 그녀는 단지 통역사 역할만을 한 게 아니라 코르테스가 원주민 문화와 정치를 이해하도록 도왔다. 또 원주민들에게도 힘을 합쳐 아스텍을 무너뜨리자고 설득했다. 그동안 아스텍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인신공양 제물로 바쳐지던 부족들을 스페인 편으로 만든 것이다. 아마도 그녀가 없었다면 코르테스는 아스텍을 정벌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민족주의 관점에서 그녀는 ‘배신자’다. 그럼에도, 당시 상황을 근대적인 민족 개념으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녀가 아스텍에게 핍박받던 부족 출신이고, 마야에 노예로 팔려간 점을 생각하면. 그녀는 아스텍이나 마야에 빚진 것이 없다. 이 점에서 그녀를 전통 원주민도, 스페인도 아닌 제3의 신생 국가 즉 오늘날 멕시코를 탄생시킨 인물로 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에르난 코르테스와 말린체가 낳은 마르틴은 실질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오늘날 멕시코의 출발점인데,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벽화 <멕시코의 역사(1931)>에서 마르틴을 그야말로 기저(基底)에 놓은 것도 그런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말린체와 마르틴의 평가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말린체는 언어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녀는 번역, 소통, 이해를 상징한다. 또 마르틴은 그 언어적 소통의 결실이자 근대적 멕시코의 출발을 상징한다. 이 점에서 영화가 멕시코 원주민 언어를 채록, 번역하는 인물에게 마르틴이란 이름을 붙이는 한편, 영어와 미국에 경도된 신세대와 대조되는 성격으로 설정한 것은 흥미롭다.
더구나 마르틴이 ‘베라크루스 대학’의 언어학자로 설정된 것은 더 의미심장하다. 거듭 말하지만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처음 상륙한 곳이 현재의 베라크루스이다. 이곳은 에르네스토 감독 형제가 태어나 자란 도시이기도 하다. 감독의 개인사는 나중에 살펴보고, 일단 영화가 내포한 언어관을 생각해보자.
• 영화의 언어관
“한 언어가 죽으면, 하나의 가능한 세계도 그와 함께 죽는다.” 미국의 문학비평가 조지 스타이너(George Steiner)가 지은 『바벨 이후』(After Babel: Aspects of Language and Translation, 1975) 2판 서문(1992)에 나오는 말이다. 영화의 언어관은 스타이너의 말과 통하는 것 같다. 서문을 좀 더 읽어보자.
“비록 한줌의, 파괴된 공동체의 내몰린 잔존자들에 의해 사용되는 경우일지라도 한 언어는 현실에 대한 발견과 재구성과 그 나름의 꿈의 한없는 잠재성을 그 속에 간직하고 있다. 우리에게 신화로, 시로, 형이상학적 추정으로, 법의 담론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내몰린 잔존자들’은 영화 속 시크릴 종족을 떠올리게 한다. 스타이너는 비록 소수 언어일지라도 한 언어는 하나의 ‘가능한 세계’를 구성한다고 본다. 이때 언어는 사람들이 현실을 이해, 지각, 파악하는 양태다. 언어는 곧 세계(관)인 것이다. 한 언어가 사라지면, 하나의 가능한 세계도 함께 사라지는 이유다. 이처럼 ‘그들’에겐 언어적 현실인 것이 ‘우리’에겐 신화로 여겨질 수 있다.
바꿔 말해, 우리에겐 비현실적 신화로 보이는 것이 그들에겐 엄연한 현실일 수 있다. 영화는 이런 언어관을 전제한다. 감독은 언어학자 마르틴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으며, 멸종 위기의 언어를 실마리로 오늘날 멕시코와 감독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 점에서 영화에는 촬영장소와 감독의 개인사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촬영 장소
영화는 감독의 고향인 베라크루스 주에서 촬영됐다. 특히 베라크루스 시의 남쪽 투스틀라(Los Tuxtlas) 지역의 카테마코(Catemaco) 호수와 산안드레스(San Andrés)가 주요 촬영지다.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이 일대는 열대 우림의 북부 한계 지역이어서 식물이 번성하고 다양한 종의 새들이 산다.
문화의 관점에서 이곳은 인근 타바스코 주와 함께 고대 올메카(Olmeca) 문명의 중심 지역이다. 영화에서 소용돌이무늬가 새겨진 돌기둥이 여러 차례 등장하고 마르틴이 그 돌기둥을 어루만지는 장면, 에바리스토가 모자를 쓰고 묘지 석비 앞에 앉아 있는 장면은 올메카 유적에 대한 오마주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에바리스토의 회상 장면에서 젊은 시절의 이사우로와 마리아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물가는 카테마코 호수다. 이곳은 지역 주민들의 전설 속에서 올메카의 발상지로 여겨진다. 올메카의 관점에서는 태초의 인간이 살던 낙원이며 ‘에덴동산’인 셈이다. 카테마코가 지니는 이 상징성은 에바리스토가 이곳을 ‘잃어버린 낙원’ 즉 ‘실낙원’으로 회상하는 장면에서 적절하게 활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베라크루스 지역은 원래 동성애에 관용적이었다.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는 이 지역에서 남자가 여자 옷을 입는 행위나 남자들의 동성애가 횡행한다고 기록했다. 이윽고 스페인에서 들어온 정복자들과 가톨릭은 동성애자를 교수형에 처한다고 발표하고, 동성애를 금지한다. 영화에서 에바리스토가 예수 상을 보고 죄의식을 느끼는 장면은 이처럼 16세기 이후로 가톨릭이 동성애를 금지했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물론 멕시코 원주민들이 모두 동성애에 관용적이진 않았다. 아스텍은 스페인만큼이나 동성애에 배타적이었고, 오직 사제에게만 동성애적 행위를 허용했다. 반면 동성애에 가장 관용적인 사람들은 ‘테완테펙(Tehuantepec) 지협’에 사는 소수민족인 사포텍(Zapotec)이었다. 이들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을 인정하고, 동성애를 사회적으로 인정했다. 감독의 친할머니는 바로 테완테펙의 사포텍 출신이었다.
• 감독의 할머니
감독은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할머니가 사포텍어로 말하는 것이 싫었다고 회상한다. 어느 날 할머니가 돌아가실 무렵, 할머니는 사포텍 언어로 뭔가를 말했는데, 감독 형제는 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감독 형제가 할머니의 언어를 배우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고, 후회하게 된 이유다. 이들의 미안하고 절박한 마음은 영화 속 이사우로가 죽는 장면에서 표현된다.
이사우로: jaide upive… upiveje.
마르틴: 모르겠어요… 뭐라고 하신 거예요?
할머니의 사포텍 문화는 그 외에도 영화 곳곳에 반영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1920년대부터 세계 예술가들이 이곳을 주목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인류학자 톰 데못(Tom DeMott)이 이곳을 “성적으로(sexually) 해방된 아마조네스”로 표현할 만큼 테완테펙의 사포텍은 독특한 젠더 개념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영화와 관련된 내용으로는 ‘여성 가부장제’(matriarchy)와 ‘제3의 성’ 개념을 들 수 있다. 20세기 예술가들이 주로 전자에 관심을 쏟았다면, 영화는 후자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물론 두 개념은 밀접하게 연결됐다. 먼저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가 유럽에서 돌아와 테완테펙을 찾은 계기는 이곳에서 여성 가부장제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디에고의 회화 작품 <테완테펙의 목욕하는 여인들>(1923, 1925)은 그가 이곳을 탐구한 뒤로 유럽적인 화풍에서 벗어나 멕시코 전통을 담은 화풍으로 바뀌는 결정적 전환점을 보여준다. 곧이어 프리다 칼로(Frida Kahlo)도 이곳을 사랑하고 탐구했는데, 대표적으로 1943년 자화상은 사포텍의 축제 복장이고, 500페소 지폐에 인쇄된 모습도 사포텍 복장이다.
• 여성중심의 가부장제
1930년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Sergei Eisenstein)이 이곳을 찾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 흔적은 <비바 멕시코>(¡Que viva México!, 1979)에 담겼는데, 모두 6장으로 이뤄진 작품에서 ‘야단법석’(Sandunga) 장은 테완테펙 사포텍의 결혼 문화를 그린 것이다.
예이젠시테인은 이곳 남자들이 해먹에서 빈둥거리는 모습과 대조적으로 여자들이 장터에서 장사를 하는 모습, 또 주인공 여자가 장터에서 돈을 모아 금화 목걸이를 완성하고 남자에게 구혼하는 모습을 담았다. 예이젠시테인은 이곳의 어머니 문화를 가리켜 “마치 여왕벌처럼, 엄마가 다스린다”고 했다.
미국 사진가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도 이곳의 성별 노동 분화를 지적하며 “여자는 장터에서 상업을 맡고, 남자는 신체노동”을 한다고 기록했다. 말하자면 남자는 하찮은 일을 하고, 여자가 중요한 일을 하며 경제를 맡는다는 이야기다. 이 노동 분화는 지금도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오늘날 인류학자의 상당수는 이곳이 ‘여성 가부장제’가 아니라 ‘어머니 중심(matrifocal)의 남성 가부장제’라고 본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엄마가 ‘실세’이고, 여자가 문화적 주도권을 쥔다는 것이다. 또 리베라나 예이젠시테인은 이곳 여자들이 나체가 되는 것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했고, 웨스턴은 “자유연애가 일상적”이라 했는데, 이것도 상당 부분 사실인 것 같다.
특히 성 담론에 연관해서 이곳 언어에는 금지어가 없고, 신체 특정 부위와 기능의 언급이 저속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다. 또 자신의 딸을 농담 삼아 ‘작은 여자 성기’(Little Vaginas)로 부른다는 보고도 있다. 이처럼 자유로운 성 담론과 여성 문화는 한 가지 독특한 현상으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동성애에 관용적이고, 제3의 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 제3의 성, Muxe
무셰는 ‘여성 남자’다. 일상적이고 공개적으로 여성으로 살아가는 남자다. 인류학자인 알프레도 미란데(Alfredo Mirandé)에 따르면 사포텍은 가족 가운데 하나가 무셰로 판명되면 이를 반긴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한 성별 노동 분화와 연관된다. 보통 남자와 달리 무셰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을 한다. 무셰의 탄생은 실질적으로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경제활동 인구의 증가를 말하는 것이다. 가족들이 무셰를 반기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무셰는 여자 일을 돕기도 하지만, 주로 예술 공예를 생계로 삼는다. 남녀 노동 분화의 틈새 영역인 장신구, 의상, 자수, 보석 세공 일을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사우로는 모래밭에서 조개껍질 같은 것을 들고 와 마리아에게 뭔가를 말한다. 에바리스토는 마리아에게 그 말을 번역해주고 미소 짓는다. “목걸이를 만들어주겠대.” 사포텍의 관점에서 이사우로가 무셰라는 것, 또 에바리스토는 그가 무셰임을 잘 안다는 것을 표현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독특한 사포텍 문화를 생각할 때 감독의 할머니가 타향에서 얼마나 살기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감독은 할머니가 손자들에게 사포텍어를 말하고, 사포텍어를 가르치려 하는 게 싫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할머니에겐 그게 삶의 전부였을 것이다. 인생의 말년에 할머니는 마침내 스페인어를 전혀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감독의 이런 체험은 영화에서 이사우로의 인물 성격으로 표현된 것 같다. 언어 소통의 불능과 함께 오는 문화적 단절과 고립이라는 성격에서 감독의 할머니와 이사우로가 겹친다는 이야기다. 이사우로 또한 죽는 순간까지 스페인어를 말하지 않았다.
• 사포텍의 창조신은 무셰
영화와 연관되는 사포텍 신화의 요소를 몇 가지 살펴보자. 사포텍은 영화의 시크릴처럼 다신교 문화를 이뤘다. 사포텍의 신 가운데 ‘창조하는 신’이 있는데, 코사나(Cozaana)와 노위차나(Nohuichana)가 바로 그 창조신이다. 코사나는 조상신, 사냥 신이며, 모든 동물을 낳는다. 노위차나는 물, 강의 신이며, 사람과 물고기를 낳는다. 그런데 이들이 별개의 신이 아니란 점에 주의하자.
이들은 같은 신의 남성과 여성적인 면에 각각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것은 남성 신인 코사나도 ‘낳음’(출산)의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한 마디로 사포텍의 창조신은 양성을 띠는 제3의 성, 무셰인 것이다. 사포텍의 무셰 또는 동성애 문화는 이처럼 신화 차원에서부터 근거를 지니며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통합되고 있다.
사포텍 신은 피타오(Pitao)로 부른다. 피(Pi)는 ‘영, 숨, 바람’이고, 타오(Tao)는 ‘큰, 신성한’을 뜻한다. 마이클 린드(Michael Lind)의 연구에 따르면, 집안에서 어떤 소리를 들었는데 그 출처를 찾지 못할 때 사포텍인들은 신이 왔다고 생각한다. 영화 전반부 하신타(Jacinta) 할머니가 돌아가신 그날 밤, 마르틴이 어떤 소리 때문에 깨어나 집밖으로 나와 보는 장면은 이 문화와 연관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종족의 기원에 관해서 사포텍 족은 지배층과 평민으로 나눠서 이야기한다. 지배층은 구름에서 내려왔다고 말한다. 사포텍이란 이름도 ‘구름 사람’(Cloud People)을 뜻하는 말이다. 평민들은 자신의 시조가 땅속에서 동굴을 통해 나왔다고 믿는다. 또 일부는 재규어나 나무가 사람으로 변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이 공유하는 믿음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사포텍이 죽으면 원래 상태로, 장소로 돌아간다는 믿음이다. 영화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동굴로 들어간다는 설정이 사포텍 신화와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영화가 촬영된 베라크루스 지역에도 ‘저승으로 통하는 악마의 동굴이 투스틀라 산악 어딘가에 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럼에도, 조상들이 망자를 동굴로 안내한다는 설정, 또 회상 장면에서 두 사람이 동굴을 거쳐 호수로 나가는 모습과 결말부에서 두 사람이 다시 동굴로 들어가는 모습이 대조되는 것은 사포텍 신화에 가깝다.
• 신화적 언어
종족의 기원에 관한 사포텍 신화는 시크릴이 ‘밀림 속 만물의 공용어’인 이유에도 상응한다. 시크릴이 여자 새와 남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것처럼(“둘의 결합으로 태어난 게 인간이야. 그때부터… 인간과 동물은 모두 시크릴어를 쓰게 됐지”) 사포텍 사람은 구름이나 동굴에서 태어났고, 재규어, 나무, 돌에서 태어났다. 구름 재규어 나무 돌은 모두 사람의 부모 형제 친구인 것이다. 그러니 서로 말이 통할 수밖에.
영화에서 이사우로가 밀림에 들어가 ‘chupi upivo’라고 말하자 밀림은 순식간에 왁자지껄한 소리로 가득 찬다. 짐작컨대 이사우로의 말은 ‘안녕, 친구들’이란 뜻이다. 시크릴은 이처럼 자연을 친구로 여기는 발상에 바탕을 둔다. 자연과 인간의 대칭성에 기반 한 언어. 자연에 대한 인간의 비대칭적 우월함이 아닌 평등과 대등함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것은 ‘신화적 언어’에 속한다.
여기에 대비되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언어관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인간이 이성과 언어를 지닌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고 믿었다. 이때 ‘로고스’(logos)는 이성과 언어를 하나로 합쳐 표현하는 단어로 인간에게만 부여되는 특성이다. 반면 동물은 ‘로고스가 없는 존재’(zoa aloga), 즉 이성도 언어도 없는 존재로 여겼다. 이를테면 동물은 언어가 아닌 소리를 낼 뿐이라는 뜻이다.
이 점에서 영화는 고대 그리스적 언어관에 바탕을 둔 현대인의 언어 개념에 의문을 던진다. 이 물음은 또한 세계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 물음은 그래서 소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그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간다.
• 언어=문화=세계(관)
영화는 한 멸종 언어의 보호에서 시작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초점을 옮긴다. 여기서 영화는 앞서 말한 것처럼 ‘언어=문화=세계’라는 조지 스타인의 관점을 확대 적용한다. 이때 언어란 것은 언어 사용자들이 자연과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지평인 것이다. 영화 초반부, 마르틴은 아직 언어가 곧 문화이자 세계(관)란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마르틴: 두 분의 대화를 앞으로도 여러 번 녹음할 거예요
하신타: 시크릴에 대해서는 말만 알면 돼?
마르틴: 시크릴 문화도 연구 대상이긴 하죠…
하신타: 자네, 영 아는 게 없군
시크릴이 언어와 사람을 모두 의미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르틴이 얼마나 미숙한지 알 수 있다. 이런 태도에 경각심을 주는 장면이 몇 차례 있다. 하신타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시크릴어를 번역해주지 않는 장면. 또 감독이 대부분의 시크릴어 대화에 자막을 넣지 않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낯설게 하기’라고 할까.
현대인은 다른 소수 언어(문화)를 너무 쉽게, 보편적 언어(문화)로 번역할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 점에서 ‘자막 없는 대화’는 다른 언어의 문화도, 세계관도 잘 모르면서 그 언어를 쉽게 우리의 언어로 대입시켜 생각하는 태도에 경각심을 준다. 미국 개봉에서 라스트신, 동굴 입구의 대화조차 자막을 달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여기에 자막을 넣은 한국 개봉 버전은 어쩌면 감독의 뜻을 살짝 벗어났을지 모른다.
• 감독은 포용의 언어를 꿈꾼다.
영화 속 두 남자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이 다른 언어(문화, 세계)에서 살았다면, 무셰가 금지어가 아닌 언어 세계에서 살았다면. 실제 스페인이 들어오기 전의 멕시코는 ‘다른 세계’였다. 주류 언어 아래 과거의 언어도, 과거의 세계도 사라졌다. 여기서 감독은 또 ‘다른 언어’를 꿈꾸며,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가능성을 꿈꾸는 듯하다. 오늘날 멕시코인이 미국을 지향하고, 미국과 ‘국경 장벽’으로 갈등하는 상황에서 감독의 꿈은 신선한 관점을 환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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