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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캡틴> - '스무 살 청년, 누가 죽였나'2019-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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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캡틴> - '스무 살 청년, 누가 죽였나'
2019.4.18(콕) 19:00 영화의전당 소극장
<더 캡틴>(Der Hauptmann, The Captain, 2017)은 1945년 4월 있었던 실제 사건을 계기로 나치 독일을 지탱한 복합적 근거를 그린 영화다. 주인공은 빌리 헤롤트(Willi Paul Herold, 1925. 9.11~1946.11.14.)이다. 사건 당시에 19세였고, 그 뒤 연합군 재판에서 120명이 넘는 사람을 살해한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질 당시의 나이는 21세였다.
우리는 여기서 나치 시대에 21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진, 또 다른 청년 한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소피 숄(Sophie Scholl, 1921. 5. 9~1943. 2. 22)이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die Weiße Rose)이란 책으로 알려진 그녀는 헤롤트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소피는 오빠 한스와 더불어 뮨헨 대학의 학생, 교수들과 함께 ‘백장미’ 그룹을 만들어 나치에 저항하는 활동을 하다 붙잡혔고, 나흘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백장미 그룹의 활동 기간(1942. 6.27~1943. 2.18)은 짧았다. 또 이들의 활동은 여섯 번에 걸쳐 팸플릿을 만들고 배포한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이들이 팸플릿에 담으려 했던 정신은 숭고한 것이었으며, 단지 나치에 대한 저항이란 시대적 성격을 넘어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1952년, 백장미의 행적이 책으로 출간된 뒤로 동·서독 정부가 모두 이들을 추모한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독일이 소피와 백장미를 기억하는 방식을 보면, 이들을 혹시 ‘이데올로기적’으로 활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가령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Sophie Scholl: Die letzten Tage, 2004)를 비롯해 소피와 연관된 영화가 여러 번 제작된 데에 비해 <더 캡틴>과 같이 헤롤트의 추악한 행적을 그리는 영화는 한 번도 제작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백장미의 사회적 기억에 연관된 이데올로기는 이런 것이다. 이를테면 독일 국민들이 나치 국가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저항은 있었다’는 것. 심지어 상당수의 국민들은 마음속으로 나치를 거부했다는 근거로 활용되는 것 같다. 요컨대 전후 독일이 과거사를 정리하는 과정에 일종의 ‘변명’으로 사용됐고,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근거로 활용됐다는 이야기다.
이 관점에서 영화 <다운폴>(Downfall, Der Untergang, 2004)을 생각할 수 있다. 영화는 아돌프 히틀러의 마지막 여비서인 트라우들 융어(Traudl Junge, 1920. 3.16~2002. 2.10)가 지켜본 총통과 그 측근들의 최후를 그렸다. 트라우들이 여비서로 일한 것은 2년 반 정도(1942.11~1945. 4)인데, 영화는 <더 캡틴>과 마찬가지로 1945년 4월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 백장미의 기억과 <다운폴>의 이데올로기
일단 주목할 것은 트라우들이 소피와 같은 또래이고, 22세의 트라우들이 히틀러의 비서가 된 시기는 바로 21세의 소피가 처형당한 1942년 겨울이며, 두 사람은 모두 뮌헨 출신이란 점이다. <다운폴>의 도입부와 결말부에는 트라우들의 인터뷰 영상이 나오는데, 이 영상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시종일관 ‘무지의 소치’를 내세운다는 것이다. 도입부 진술을 들어보자.
“어렸던 제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철없던 제가 용서가 안 되죠. 무서운 괴물의 본성을 알지도 못한 채 그냥 시키는 대로 일을 했으니까요. 왜 그 일을 받아들였을까요? 저는 나치 사상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베를린에 있을 때 거절할 수도 있었거든요.… 하지만 거절하지 못했어요. 호기심 때문이었죠. 생각이 짧았던 거예요. 제가 원치 않는 삶이었다는 걸 몰랐어요. 이유를 막론하고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진술은 반성의 형식을 띠지만, 자신이 가해자였다는 반성은 없는 것 같다. 자신이 오히려 피해자라고 항변하는 느낌이랄까. 진술에는 ‘어렸다’ ‘철없었다’ ‘호기심’ ‘몰랐다’는 표현이 두드러지고, 자신은 ‘무서운 괴물’ 즉 히틀러의 본성도 몰랐고, 나치 사상도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1940년대 상황에서 스물 두 살의 나이를 두고 어리다, 철없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말부도 들어보자.
“뉘른베르크 재판 중에 들은 것들은 끔찍했어요. 6백만 명의 유대인, [나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 또는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충격적이었죠. 하지만 제 자신과는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죠. 제가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킨 거죠. 그러한 범죄가 일어났던 것조차도 저는 전혀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어느 날 길을 걷다 기념비를 봤어요. 프란츠 요세프 거리에 있는 소피 숄의 기념비였죠. 그걸 보니 그녀와 저는 태어난 해가 같았는데 제가 히틀러의 비서를 시작한 해 처형당했더라고요. 그 순간 저는 깨달았어요. 어려서 무지했다는 건 변명이 안 되고, 원했더라면 진실을 알 수 있었다는 걸 말이죠.”
‘모르쇠’로 일관한다(나치의 학살과 탄압을 전혀 몰랐다, 그 사실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처음 들었다). 그러면서 소피 숄을 언급한다. 물론 반성의 형식을 띠며, 어려서 무지했다는 건 변명이 안 된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여기서도 강조점은 ‘어려서 무지했다’는 점에 있는 듯하다. 그런데 트라우들은 과연 자신이 진술한 것처럼 아무 것도 몰랐을까? 글쎄다. 1943년 6월, 그녀는 히틀러의 중매로 한스 헤르만 융어(1914~1944)와 결혼한다. 비서가 된 지 겨우 6개월이 지난 때다. 한스 융어는 히틀러의 절대적 신뢰를 받던 개인 비서(valet)였고, 무장친위대(Waffen-SS) 중위였다. 이처럼 히틀러의 최측근이자 SS 중위와 결혼한 사람이 나치의 잔학 행위를 전혀 몰랐다고? 더구나 비서가 되자마자 결혼까지 한 사람이 스스로를 ‘어렸다’고 말하는 것은 어색한 변명으로 들린다.
• 안티-다운폴(Anti-Downfall)
영화 <다운폴>의 문제점은 소피와 백장미의 사회적 기억에 포함된 변명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트라우들의 진술에 나타난 모순의 연장선 위에 있다. 로베르트 슈벤트케 감독이 <더 캡틴>을 가리켜 ‘반(反) 다운폴’(Anti-Downfall)이라고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감독이 생각하는 <다운폴>은 당시 독일국민을 소수의 결정권자와 다수의 무고한 사람들로 양분한다. 그리고 히틀러와 친위대 SS와 같은 소수의 결정권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한편, 히틀러 주변의 몇몇 이성적 측근과 시민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반면 <더 캡틴>은 ‘탈(脫)신화’를 지향한다. 이때 신화는 전후 독일이 지금까지도 붙들고 있는 ‘잘못된 믿음’을 말한다. ‘국방군 무오설(無汚說)’ ‘깨끗한 국방군’(the clean Wehrmacht) 신화가 대표적이다. 이것은 SS를 제외한 일반군인(=국방군)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었고, 단지 총통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란 믿음이다. 여기에 덧붙여 독일인들은 당시 국방군에 탈영병이 없었다고 믿었다. 이것은 독일 민족성의 성실함에 연관된 신화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무지와 성실, 즉 몰랐거나 성실했다는 것으로 요약되는 이 신화들은 마침내 1989년 구소련이 몰락할 때 공개된 자료와 더불어 무너진다. SS가 아닌 일반 국방군들이 민간인을 학살한 증거가 쏟아진 것이다. 증거 사진들은 ‘국방군 전시’라는 이름으로 1995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전국 순회 전시로 공개됐는데, 이를 두고 ‘대다수 국민들을 모두 범죄자로 만드는 전시’라며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기도 했다.
<더 캡틴>의 제작 배경은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독일 국민을 가해자 시점에서 그렸다. 감독의 말처럼 전후 독일에서 1인칭 가해자 시점에서 독일인을 그린 영화는 거의 없었다. 반면 <더 캡틴>은 SS가 아닌 공군장교를 사칭한 주인공과 일반병사의 탈영, 약탈, 일탈 행위를 담았다. 또 유대인이 아닌 동족 살해를 묘사한다. 주인공 일행이 같은 독일 군인과 시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시민과 군인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독일 국민들이 각자의 이해로 주인공 일행의 폭력을 방조하는 모습을 그렸다. 영화는 이처럼 전후 독일의 탈신화화를 수행하는 것이다. 영화의 펀딩과 배급이 힘들었다는 감독의 말이 단순히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 쾨페니크(Köpenick) 사건과 고골의 <감찰관>
구성 측면에서 영화는 1906년 쾨페니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구두 제화공인 포크트(Wilhelm Voigt)가 대위 제복을 입고 쾨페니크 시청을 방문해 거액의 공금을 사취한 사건을 말한다. 이로부터 ‘대담한 사기’를 뜻하는 독일어 Köpenickiade란 단어가 생길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다. 1926년 <쾨페니크에서 온 대위>란 제목의 코미디 소설과 연극으로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여덟 편이 넘는 장·단편 영화와 TV 영화가 제작됐다.
아마 헤롤트도 이 사건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 캡틴> 또한 <쾨페니크에서 온 대위>와 비슷한 블랙 코미디 요소를 포함한다. 물론 <쾨페니크에서 온 대위>가 유쾌한 코미디인 것과 대조적으로 <더 캡틴>은 매우 어두운 비극성을 기조로 하지만 말이다. 한편 영화 구성에 연관되는 문학 작품으로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감찰관>(The Government Inspector, 1836)을 들 수 있다.
<감찰관>은 어떤 시골 마을사람들이 한 이방인을 비밀 감찰관으로 오해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희곡이다. 당시 사회의 총체적 부패상을 코미디 형식으로 담았다. 시장, 여관 주인, 지주, 관리, 시장 부인과 딸, 우체국, 헌병… 특히 결말 부분에서 헌병이 들이닥치며 진짜 감찰관의 등장을 알리자 그동안 가짜 감찰관에게 속았던 마을 사람들 모두가 놀라서 얼어붙는 장면은 <더 캡틴>의 결말부에서 헌병대가 등장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더 캡틴>은 또한 <감찰관>과 마찬가지로 나치 독재를 지탱한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근거를 보여준다. 먼저 시민들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평소 독일 군인을 경멸하던 주민들(“사람들이 이젠 군복이라면 질색해서요. ―특히 독일 군복요.” “기생충 같은 놈들”)은 주인공이 탈영병의 약탈에 대한 피해 보상을 약속하자 곧바로 태도를 바꾸며 ‘히틀러 만세’를 외친다. 또 주인공은 탈영병 집단을 만난다. 그 수장인 키핀스키는 주인공의 정체를 불신하지만, 자신들의 범죄적 삶을 지속하기 위해 이 가짜 대위를 따른다. 이들과 함께 이동하던 주인공은 헌병대 검문을 받는다. 그는 자신이 총통의 특명을 받았다며 수첩(신분증) 제시를 거부하는데, 헌병대 지히너 대위는 최고 지도자의 문책이 두려워 검문을 중단한다.
지히너 대위와 함께 탈영병 수용소에 찾아간 주인공은 영화 도입부에서 자신을 추격하던 융커 대위를 만난다. 융커는 주인공이 수용소 죄수를 불법 처리해줄 것을 기대하며 그의 가짜 신분을 묵인하고, 수용소 경비를 맡은 돌격대(SA)의 쉬테 또한 같은 이유로 주인공에게 적극 협력한다. 한편 수용소 소장인 한젠은 이들이 군사재판도 열지 않고 죄수들을 처분하려는 계획에 반대한다. 그럼에도, 한젠의 관심사는 오직 문책 여부에 있었다. 이윽고 책임 소재가 명확해지자 이들의 행위를 방조한다.
• 저항하는 소수 vs. 총체적 부패
이들이 비정상적인 행위를 이어가는 가운데 영화는 ‘저항하는 소수’를 묘사한다. 한젠의 부관은 주인공의 면전에서 그를 비판한다(“이건 규정에 한참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대위님이 저지른 일은 군의 수치예요. 이런 비인간적인 행위는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공을 따르던 프라이타크 또한 그의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고 괴로워한다.
또 ‘땅파기 전담반’은 아직 숨이 붙어있는 죄수들을 땅에 파묻으라는 명령에 반항하며 삽을 집어 던지고 작업을 중단한다(“이 끔찍한 꼴을 좀 보십시오.” “이런 개 같은 일은 직접 하라고 하세요.” “아, 못 해먹겠네.”) 그날 밤 주인공 일행은 죄수 90명의 살해를 자축하는 파티를 열고, 배우 두 명과 악사를 부른다. 술 취한 병사들이 명령에 불복종한 땅파기 전담반을 폭행하는 가운데 주인공은 배우 한 명에게 권총을 주고 전담반을 사살하라고 명령한다. 이때 배우는 자신의 목에 권총을 발사하며 그 명령에 저항한다.
영화는 이처럼 온 나라에 나치의 광풍이 불던 시대에도 건전한 상식을 지닌 사람이 있었고, 몰상식한 명령에 저항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야말로 소수다. 이것은 전후 독일의 왜곡된 신화와 달리 나치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아닌 소수였다는 감독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듭 말하지만 감독은 나치 독일 체제를 지탱해준 복합적 관계에 주목한다.
결말부의 군사재판 장면은 인상적이다. 해군 소장과 융커 대위는 한 목소리로 헤롤트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를 감싸준다. 곧이어 주인공은 창문 밑으로 밧줄을 늘여서 재판소를 탈출한다. 실제 헤롤트는 전란의 와중에 재판소에서 사라졌는데, 이것이 감시 소홀을 틈탄 도주인지, 아니면 재판소가 일부러 풀어준 것인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영화는 두 번째 설명을 채택하며, 당시 사회의 총체적 부패를 드러내는 사례로 이 장면을 제시한 것이다.
백장미의 여섯 번째 팸플릿에는 “모두가 유죄, 유죄, 유죄다”란 문장이 있다. <더 캡틴>의 관점에 상응하는 문구라고 할 수 있다. 누구도 헤롤트 일행을 막을 수 없었고, 막지 않았다. 이 점이 중요하다. 영화는 이 사실에 대한 통찰과 반성이 없으면 헤롤트와 나치가 언제든 부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헤롤트 즉결 심판소’가 현재의 도시에서 만행을 저지르는 장면은 바로 이 점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 낯설게 하기
영화 속에서 컬러 장면은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수용소가 초토화된 다음에 딱 한 번 나온다. “2번 수용소는 수용소 정문의 벽돌 기둥만 남기고 사라졌다. 주변에 보이는 건 벌판뿐이었다.”는 자막에 이어서 이곳의 현재 모습이 컬러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장면 또한 주인공의 행적이 단지 과거의 역사에 머물지 않고 현재에도 살아있으며, 언제라도 재연될 수 있는 사건이란 생각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영화 주제의 현재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뜬금없이 제시되는 수용소의 현재 모습이라든가 현대판 헤롤트 즉결 심판소 장면은 영화의 완결미를 깨뜨리고 몰입을 방해한다. 이런 표현을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관객이 과거의 이야기에 몰입하거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동정)하는 것을 방해하며, 주제의 현재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영화 곳곳에 나타나는 기계소음(industrial sound)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수용소의 현재 모습과 기계소음의 병치, 또 후반부 파티에서 기계소음과 낭만적 음악의 혼성은 관객을 낯설게 만들고 불안하게 한다. 그 결과로 관객들은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에 거리를 두고 보게 된다. 게다가 주인공은 대부분 역방향(우→좌)으로 움직인다. 주인공의 행적이 ‘시대역행적’임을 상징할 뿐 아니라, 감성 차원에서 관객을 불편하고 낯설게 만든다.
이처럼 영화는 갖가지 ‘낯설게 하기’ 장치를 통해 주제의 현재성을 표현하는데, 이런 가운데 주인공과 연관된 ‘언더도그 효과’도 상쇄된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쫓기고 달아나는 인물이다.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얼굴의 주인공이 계속 아슬아슬한 상황에 내몰리는 모습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제발 들키지 않았으면! 하지만 영화는 관객의 동정심과 동일시를 교란하며 그가 가해자란 사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 고야, 비스콘티, 양철북
한편 영화 표현의 측면에서 수용소 죄수를 학살하는 장면과 키핀스키의 폭행 장면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의 ‘전쟁의 재앙’(Los Desastres de la Guerra) 연작을 떠올리게 한다. 대표적으로 <1808년 5월 3일>(El Tres de Mayo 1808)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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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화는 정작 주인공의 인물성격을 ‘공백’ 상태로 비워둔다. 가령 도입부에서 주인공이 도주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 이후의 범죄 행위와 연관해서 주인공의 심리 상태와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유년기의 묘사도 없다. 주인공의 범죄 심리적 동기를 거의 묘사하지 않는 것이다. 영화는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그 대신 비정상적 행각을 지탱해준 복합적 근거를 보여주는 것에 치중한다.
물론 영화는 주인공의 범죄 행각이 시간이 흐를수록 상승, 강화되는 양상을 묘사하는 가운데 주인공의 강렬한 생존본능과 함께 모종의 개인적인 심리적 동기에 대한 추측의 여지를 남겨 준다. 가령 주인공의 유아적 측면을 예로 들 수 있다. 탈영병 집단에게 밧줄로 차를 끌게 하고, 의기양양하게 차 위에 서있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으스대는 모습 같다. 또 주인공은 두어 차례 아버지를 언급한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헤롤트는 영화 <양철북>(Die Blechtrommel, 1979)의 주인공 오스카를 떠올리게 한다. 대공포로 죄수들을 사격하는 현장에서 귀를 막고 소리 지르는 모습,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려하고, 무엇이든 가지려 하는 태도, 또 팬티 차림에 제복 상의와 모자를 쓰고 으스대는 모습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럼에도, 주인공의 개인 심리적 묘사는 영화의 초점이 아니다. 이 관점에서는 오히려 키핀스키의 성격이 중요하게 배치된다. 범죄 성향을 지닌 키핀스키는 주인공이 가짜인 줄 알면서도 그 사실에 대해 함구한다. 심지어 주인공의 손에 죽는 순간까지도. 키핀스키는 비록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이 즐기던 체제의 지속을 바란 것일까. 이 점에서 그는 일종의 체제 수호 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즉결처분을 받으러 끌려가며, 노래를 부른다.
“처녀의 가슴 속에 날아든 악마처럼
난 그대 가슴속에 날아들었고
죽어서도 그곳에 남아 있겠노라
그대 가슴속에”
감독의 관심사는 이처럼 주인공의 개인 심리보다는 그의 범죄를 방조하는 체제와 수호세력에 있다. 영화는 이 비정상적인 체제의 수호가 곧잘 정상적인 절차에 맞게 진행됐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전화 통화 결투’ 장면이 대표적이다. 전화 결투는 주인공이 수용소 죄수를 처리하는 권한을 얻어내려고 수용소 소장과 충돌하면서 일어난다.
• 정상 절차의 문제
이 결투의 내용은 권력 투쟁이고, 형식은 승인 절차 경쟁이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계열이 경쟁한다. 소장은 이 사안이 법무부 소관이라고 믿지만, 쉬테는 이에 맞서 지방장관과 게슈타포를 끌어 들여 주인공을 돕는다. 영화는 두 계열의 충돌을 매우 영화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각자의 사무실에서 각자의 권력자에게 전화를 하는 모습이 긴박한 대결 국면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나는데 소장은 단지 ‘책임 소재’가 어디인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란 것이다(“절차를 밟아야지. 누가 책임지려고 그래”). 우리는 이 흥미진진한 승인 절차 경쟁에 100명이 넘는 죄수의 목숨이 달렸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런데 문제는 두 계열 가운데 누구도 이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영화가 던지는 물음이 있다. 절차에 부합하면 반인륜 행위도 괜찮은가.
유대인 학살의 실무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절차 형식에만 매달린 인물이었다. 1960년 예루살렘 재판에서 그는 나치 독일의 법률 체계를 위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신의 행위가 무죄라고 주장했다. 여섯 명의 심리학자들도 인정한 것처럼 이 나치 친위대 중령은 괴물도, 정신병자도 아니었다. ‘정상인들’이 ‘정상 절차’로 진행한 나치즘. 그럼, 잘못은 대체 어디서 발생했나.
전화 결투 장면이 던지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아이히만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음’에 있다. 절차의 타당성에만 집착하고, 타인의 생명과 행복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었다. 이 관점은 전화 결투에 참여한 이들뿐 아니라 주인공과 그를 방조한 이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고, 당대 사회에서 용인되는 행위라 해도, 반인륜 행위에 대해서는 스스로 판단 능력을 갖춰야한다고 말이다.
분명 헤롤트 사건의 주범은 헤롤트이다. 영화는 주인공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주인공이 마음대로 날뛰게 허용해준 복합적 관계에 대한 통찰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헤롤트 같은 인물은 언제라도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과거는 현재”(the past is now)라는 감독의 말은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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