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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하는 침략자> : 망각의 인류학2018-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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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침략자 : 망각의 인류학
구로사와 감독에 대해서는 긴 이야기를 안 드려도 다들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는 세계적으로 인정을 많이 받고 있고, 일본 내부에서는 고레에다 감독보다는 이 분을 더 예술적으로 존중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이분이 왜 황금종려상을 먼저 받지 못했는가하는 불만에 찬 팬들도 많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굉장히 인정받는 분인데, 이 영화를 보면 왜 그렇게 인정을 받는 분인가 의아한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요. 그런 생각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구로사와 감독에 대해 긴 이야기를 드리기보다는, 영화적인 흐름과 맥락을 알기위해서는 오늘 나중에 경품으로 드릴 책이기도 한데, 『영화장화』라는 책을 구성하는 저 멤버들, 이른바 하스미 시게히코를 중심으로 한 ‘하스미 학파’라고 할까요. 저 흐름, 집단에 어떤 맥락 속에서 이 분을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책을 보면 하스미 시게히코, 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 세 사람이 자유롭게 대화를 주고받는데요. 구로사와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 영화세계의 최고 첨단에 제일 앞서 있고 중심이 되는 두 사람은 한쪽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있고, 또 한쪽에는 ‘장-뤽 고다르’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격은 다르지만 이 두 사람이 최고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가고나면 영화는 누가 짊어지나, 세계는 누가 지키나. 이럴 때 아오야마 감독이 ‘그 점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일 겁니다.’하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최고의 영화감독 혹은 예술영화감독하고는 좀 뒤죽박죽이죠. 고다르라고 하면 그럴듯한데,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필버그가 나오니까요. 그런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고요.
책에서 두 가지를 뽑아서 말씀드리고자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화는 뭘 하는 것인가? 영화는 뭔가를 생각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던 것이 흔들리고 무너지도록 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다.’라는 영화에 대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갑자기 알았다고 여겨지는 순간을 만드는 영상과 음향’ 스스로가 억지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알게 된 순간이 영화를 보면 찾아오는데, 그것은 살아있는 현재를 뒤흔드는 현실적인 체험이고 그런 체험이 영화에는 있다. 그리고 그런 체험을 만들어 내는 것이 영화이고, 영화를 보는 사람이다. 그것은 어느 순간에 사건처럼 일어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책 표지에 보면 그것이 영화에는 있다는 것을 핵심문장으로 뽑아놨습니다.
‘생각하고 있던 것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이 영화다’라는 점에서 우리가 미셀 푸코, 롤랑 바르트, 질 들뢰즈 이런 흐름 속에 하스미 시게히코, 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의 사고가 있거든요. 저런 사람들이 공유하는 탈-코드, 기존 코드로는 안 되겠다. 이걸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기존의 코드를 뒤집고, 벗어나는 것이 인간은 가능할까?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아는 순간이 유레카처럼 찾아온다.’ 아오야마 감독 같은 경우에 영화 ‘유레카’를 만들기도 했죠. 억지로 이거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멋모르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영화적 순간인데, 조금 있다가 자세히 말씀 드리겠지만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화만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는, 표상할 수 없는 것을 표상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엮어보고자 합니다.
탈-코드, 코드의 전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도입부에 여학생 몸을 한 우주인 ‘아키라’가 걸어오는데, 드럼통이 뒹굴고 트럭 같은 게 엎어지거나 터지죠. 바로 탈-코드 적인 것이고 한번 뒤집어 보자는 감독의 의도가 잘 나타난 장면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말씀드리겠지만 코드를 한번 뒤집어 보자는 것이 중요한 목표입니다. 오늘 영화도 그렇고 감독의 목표도 그렇고 한번 뒤집어 보자, 다른 세상을 한번 만들어보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를 고민해 보는 것인데, 기존 코드를 바꾸려면 굳어있는 ‘Ego’ 자의식을 한번 깨야한다는 겁니다. 깨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는 것인데, 어떻게 깰 수 있는가? 오늘 영화 같은 경우에는 ‘망각’이라는 것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망각’이 머리를 깨기 위해서 작용을 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영화에서 주목할 점 몇 가지를 본다면, 먼저 인류는 개념의 속박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감독이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는 지구인과 외계인이 만나서 서로 변화한다는 것이 재미있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지구인이 변화한다는 것은 개념을 뺏겼을 때 결국 그 사람들이 헤매다가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고, 심지어 신문기자 ‘사쿠라이’도 그렇고 아내 ‘나루미’ 같은 경우엔 외계인을 좋아하게 되죠. 그런 설정과 외계인도 ‘사쿠라이’와 같이 활동하던 ‘아마노’ 같은 경우에도 나중에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되고, 동료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신지’ 같은 겨우 우주인 신분을 망각하고 ‘나루미’를 좋아하게 되는 그런 설정, 상호 변화를 통한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아내가 가짜 남편을 사랑한다는 점에 주목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굉장히 자연스럽게 흘러가지만 보통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런 것을 계기로 해서 아까 말씀 드린 주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의 기본 모티브가 되는 신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건 제 생각인데요. 준비하느라 제 능력에 가능한 해외문헌이나 영화에 관한 평론을 봤는데,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생각은 구로사와 감독을 다음에 만나서 확인하고 싶은데, 우선 제 생각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이 영화는 신화를 바탕에 두는데, 어떤 신화인가하면 ‘알크메네(Alcmene) 신화’를 바탕으로 둔다는 겁니다. 알크메네는 남편이 있었는데, 제우스가 이 알크메네를 탐해서 남편을 모습을 해서 접근해 하룻밤 잠을 자게 됩니다. 제우스가 신이라 하루를 마법을 부려 사흘 밤을 만듭니다. 남편이 전쟁터에 가있는 동안, 제우스가 남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겁니다. 남편은 ‘안피트리온’이라는 사람으로, 제우스는 그렇게 사랑을 나누고 떠납니다. 진짜 남편이 돌아오고, 여자는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몇 일전에 있었는데 또 왔느냐는 식으로요. 그러니까 문제가 터지는 거죠. 그 뒤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어떤 버전에서는 여자가 임신까지 하자 남자가 화가 난겁니다. 그래서 여자를 화형을 시키려고 합니다. 다른 버전에서는 정말 남편인 줄 알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니 용서했다는 버전도 있습니다. 착한 버전도 있고, 못된 버전도 있는데요. 그 이야기를 담은 도자기가 오른쪽 이미지에 있는 것입니다. 그림을 확대해서 살펴보면 좋은데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우스는 신화에 기록하기를 인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남편의 모습을 하고 접근했다고 되어 있는 겁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신지’가 ‘사랑이 뭔지 알고 싶어.’라는 그 맥락과 상당히 비슷하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알크메네의 신화를 바탕으로 두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림을 확대해서 보시면 아내를 장작불에 올려서 화형 시키려고 하는 버전을 그린 것입니다. 나무더미위에 앉아 있는 것이 알크메네이고, 아래쪽 두 남자는 가열차게 불을 더 올리고 있습니다. 왼쪽위에 있는 것이 제우스입니다. 그리고 오른쪽 위는 헤라로 짐작되고 사이에 있는 여자들은 누구인가하니, 혹시 점점점점이 보이시나요? 점점점점은 비를 말합니다. 화형을 당하고 있는데, 알크메네가 제우스에게 도와달라고 하늘을 보고 외칩니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린 겁니다. 비가 내리니까 정말 당신 제우스와 사랑한 것이 맞구나 하면서 화형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가운데 알크메네의 허리부분에 구슬 같은 허리띠가 보이시나요? 저모양이 희미해서 잘 보이실지 모르겠지만 몸매가 이중, 두 겹으로 되어있는 것이 보이세요? 허리띠가 가운데에 매여져 있잖아요. 저것이 옛날 사람들의 재미난 기법인데요. 원래몸매가 있고, 두 겹으로 나타냄은 임신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원래 저 몸매인데, 임신을 했다는 겁니다.
이 신화가 재미있는 것은 과연 알크메네가 알았는지 몰랐는지 이런 것도 하나의 쟁점이 되거든요. 정말 제우스인지 몰랐을까?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을까? 알고 사랑했다면 이건 어떤 사랑으로 봐야할까? 굉장히 포스트 모던한 주제를 그리스 사람들은 약 3000년 전에 이런 문제를 고민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영화에서 ‘사실은 나 우주인이야’라며 접근을 하는데, 이 주제가 재미있어서 연극화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몰리에르(Moliere)의 작품인데요. 남편이름 ‘Amphitryon’을 따서 연극화 되었고, 또 유명한 것이 근래에는 프랑스의 장 지로두(Jean Giraudoux)라는 극작가가 ‘Amphitryon 38’이라는 작품을 1929년에 만들었는데, 특히 장 지로두의 작품을 근거로 해서 만든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가 바로 장-뤽 고다르의 ‘Helas Pour Moi’(1993)입니다. 제 생각에는 오늘 이 영화의 바탕에는 장-뤽 고다르의 ‘Helas Pour Moi’(1993)가 근저해 있고, 알크메네의 신화가 바탕에 깔려있다고 저는 그렇게 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것은 그 문제의식을 연장해서 계속 물음을 던지며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했던 처절한 기록이라는 겁니다. 굉장히 싱겁고 B급이지만 본인 스스로는 굉장히 진지한 영화였다는 겁니다. 그럼 무슨 문제의식이 담겨있는가? 참고로 ‘Helas Pour Moi’(1993)는 제 개인적으로 기분이 안 좋은 영화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프랑스로 유학을 갔을 때가 여름에서 초가을로 들어설 때였는데요. 당시 가을에 개봉한 영화입니다. 그래도 고다르 영화가 새로 나왔다고 하니 봐야하지 않겠는가 하며 보러 갔는데요. 제가 불어를 또박또박 말해도 알아듣지 못할 때였는데, 대사 중간에 다른 대사게 개입하거나해서 90분 동안 미치겠더라고요. 그런 영화를 오늘 다시 이야기하게 될지 몰랐습니다.(웃음) 신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제우스신이 온 문제, 신성문제가 알아볼 수가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사랑의 문제, 이미지의 문제. 우리가 이 형상에 진심이 담겨있는가 없는가의 문제 그리고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진 그런 영화이다. 그래서 이 영화 부제목에 고다르는 ‘Proposition de cinema’(영화의 명제들)라고 했습니다. 이 신화를 통해 영화의 명제에 대해 고민하겠다고 했던 영화라는 겁니다.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유대교의 한 텍스트를 보면 ‘유대교에선 진리의 전통이 전달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난 웃어요. 진리엔 수많은 속성이 있지만, 전달 가능하단 속성은 없어요.’ 진리는 전달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진리는 온갖 속성을 다 포함하고 있지만 전달된다는 속성은 없다는 거죠. 이게 무슨 소리인가. 바로 위에서 이야기 했던 ‘사랑은 누구도 이미지화할 수 없어’라는 것과 통하는 거죠. 물건 같으면 전할 수 있죠. 정보 같은 것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이미지화될 수 없으니까 줄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게 표상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하느냐 전달 못하느냐의 문제인 것이고, 정말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죠. 사랑은 그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달이라는 것은 ‘Transmission’으로, 보통 방송에서 많이 사용합니다. 이는 오늘 영화에서 신문기자가 저 역할을 맡은 것도 우연이 아닌 거죠. 고다르 같은 경우에 영화에서 늘 강조했던 것이 TV와 영화를 대립되는 것으로 보면서 TV는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단어와 내용으로 전달 될 수만 있도록 하니까 거기는 전달 밖에 없다며 언제나 깎아내리죠. 영화로는 전달될 수 없는 것을 전달하려고 애를 쓴다. 이런 구분을 하고 대조가 나오게 된 것이죠.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머릿속으로 진지하게 상상해주세요’ 그러다가 제풀에 지쳐서 ‘이래선 꿈쩍도 안 하겠지 나도 알아’ 전달이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역설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나루미 본인이 사랑을 이미지화 할 수 없다고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래놓고는 마지막 대목에 가서 ‘신지에게 사랑의 이미지를 보여줄 사람은 나뿐이야’ ‘어서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가득 줄게’ 여기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겁이고 이것이 하스미 학파가 말하는 ‘영화적 순간’입니다. 표상할 수 없는 것을 표상하고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이미지화 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고 공유하는 것이 그 순간에 일어나는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영상과 음향과 배우들의 동작, 활동을 통해서 감독은 표현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했던 갑자기 알았다는 순간을 만드는 것이죠. 생생한 현재를 뒤흔드는 체험이고 어느 순간에 사건처럼 일어나는 그 순간을 표현하고자했다. 이 장면을 보시면 저는 이 장면을 구도로 만든 것 같아요. 비교해보면, 나루미 뒤에 이파리가 있잖아요. 저게 천사 날개 같은 느낌이 안 드세요? 그리고 세로줄, 빛 이런 것이 오른쪽의 ‘테레사의 법열’, 말 그대로 ‘엑스타시’죠. 성적인 의미도 있는 것이죠. 저때 남편 신지가 계속 아아 그러는 것이 웃기는데 엑스타시와 연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 구도를 구로사와 감독은 일부러 보여준 것 같아요. B급영화, 저예산의 한계 속에서 저 순간이라는 것을 최대한 보여준 것 같아요.
구로사와 감독은 고다르가 ‘Helas Pour Moi’에서 보여준 문제의식을 동감하면서 확장시키려고 애쓴 것 같아요. 고다르의 문제의식이라는 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긴장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어떻게 하면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까가 영화의 과제이고, 예술의 과제이기도 하죠. 그런데 고다르 같은 사람은 영화가 제일 잘 표현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계속 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고다르의 경우에는 ‘이미지화(전달) 안 되는 것을 이미지, 소리를 통해 마음속에 생성시키는 것’이라는 과제를 본인이 생각하기에 몽타주를 통해서 할 수 있고, 영화에만 몽타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오직 영화만이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고, 구로사와의 경우 숏과 숏의 연결을 통해서 그것이 불연속 적인 것들 사이에서 솟아나는 경우가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들이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컬트적이고 종교적인 색채, 냄새를 풍기는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저런 것을 듣고 나서 각자가 진지하게 다른 좋은 영화를 보면, 정말 이런 것을 말한 건가라고 생각이 들 때가 문제라는 것이죠. 오늘 영화에서도 보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긴장이 굉장히 많이 나타나는데 신지가 ‘내 진짜 모습은 당신들 눈엔 안 보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인간관계, 종교, 예술 다 걸쳐져있고, 조금 전에는 ‘테레사의 법열’도 보여드렸지만 불교에 보면 금강경의 구절과도 통하는 것이죠. ‘나를 만약 형상을 통해서 보려고 한다거나 소리를 통해서 나를 구하려한다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고 하는데 이런 테마가 굉장히 종교적이고, 신지가 했던 말과 통하는 것이죠. 이미지화 되지 않는 것을 이미지, 소리로 소통시키는 것이 진짜 소통이다. 다른 것들은 전달, 정보교환에 불가하고 그런 커뮤니케이션이 세상에 너무 많다는 겁니다. 그것이 너무 많아서 문제이고 그것만 계속하고 있으면 그것을 ‘코드’라고 합니다. 그것만 계속하고 있으면 세상은 절대로 안 바뀐다. 이것을 정말 좋게 바꾸려면 깨야하는데 무엇으로 깰 것인가. 자의식부터 먼저 깨져야한다는 고민들. 영화는 어떤 일을 할 수 있게는가 하는 고민이겠죠.
그래서 ‘망각(Oblivion)’이라는 주제가 여기서 들어오는데요. 망각은 감독의 경우에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아요. 오늘 영화에서 망각이 많이 등장하는데 한 마디로 보면 ‘Rese’이라는 문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영화 출발부터가 병실에서 남편이 망각에 빠져있잖아요. 그런데 영화 끝 무렵에는 여자가 망각에 빠져있죠. 망각으로 시작해 망각으로 끝나는 구조이고, 중간에도 개념을 빼앗긴 사람들은 전부다 개념의 망각에 들어가잖아요. 이 영화에서는 망각이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개념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말뜻이 아니라 언어의 의미 같은것이야 컴퓨터 같은 것이 있으니까 우주인들이 굳이 돌아다닐 필요 없이 인터넷을 통해 다 알게 되었을 것인데, 문제가 무엇인가하면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한 개인의 언어체계(=삶)에서 절실한 것이었다는 것이죠. 이 개념이라는 것은 삶에 있어서 기반이자 지주가 되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굴레가 되는 것이기도 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트라우마의 성격도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어떤 지식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때, 그 지식이 사라질 수 있습니까? 없잖아요. 지식을 공유한다고 사라지는 법은 없거든요. 지식을 공유할 때 사라지는 지식이 딱 한 종류가 있는데, 그것은 ‘트라우마’입니다. 상처받은 것을 이야기하면 줄어들거나 사라집니다. 유일한 지식이 ‘트라우마’. 저는 사실은 개념을 이야기 할 때마다 이 사람들이 주지 않는 것은 ‘트라우마’를 건들인 것이고, ‘트라우마’가 해소 내지는 리셋 되는 해소를 위한 출발이 되는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이때 무너짐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체계 A라는 것에 맞춰서, 동조해서 살아가는데요. 언어체계 A와의 동조에서 체계 B와의 동조로 넘어갈 때, 보통 체계 A속에서 살아가는 데 이런 식으로 외부 충격이 들어왔을 때 다른 체계로 자의이던 타의이던 바뀌는 일이 벌어지는데, 그 사이의 간극 틈에서 무너지는 일이 정신적으로 무너짐이 벌어지고 그것을 주저앉음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우주인이 무엇을 했는가 물어보면 오른쪽 사진의 우주인이 ‘소유 개념’에 대해 물어보고는 굉장히 실천하는 실천가가 되었잖아요. 저 친구가 신지에게 ‘당신 나한테 무엇을 한거냐’고 계속 묻잖아요. 그랬는데 신지는 할 말이 없는 것이, 정말 한 것이 없기 때문이죠. 상당히 정신분석 의사와 비슷한 일을 한겁니다. 혹은 절의 선승들처럼 물어보기만 한 겁니다. 물어보기만 했는데, 자기가 변한 것이죠. 코드 동조에 대해 시동을 걸고 그것에 대해 낯설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죠. 그때 체계 A에 있던 사람 중에 이것이 이상하다고 하면서 낯설어지고 다른 체계로 넘어갈 기회, 계기가 되는 것이죠.
언어체계를 교체하는데 있어서 망각은 필수적이다. 이때 언어체계교체라는 것은 단순히 언어만이 아니라 한사람의 사고방식 전체, 사고방식은 삶을 지배하니까 삶의 전체라고 보셔도 되는데요. 언어체계 교체에서 망각은 중간에 한번 거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체계로 가면 그 전 체계는 잊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물음을 통해서 ‘트라우마’를 인식하게 되고, 무너지고, 기존언어체계에서 넘어가려고 하는 상황에서 아직 없으니까 마련되는 동안 헤매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하스미 학파에서 말하는 영화적 순간과 통하는 것이고,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망각이라는 테마와도 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독은 ‘창조적 파괴’라는 의미로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보기에는 B급영화가 맞지만 감독이 신경을 많이 쓴 것이 사무실에서 난동 부릴 때도 옆에 회사원들 동선을 보면 엄청나게 몇 사람 안 되는데 왁자지껄하게 보이도록 동선을 잘 짠 것입니다. 신지가 ‘일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러 갈 때도 동선이 활력적으로 보이게 동선을 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이 ‘활극’이라는 겁니다. 활극이라는 것이 꼭 사람을 때리고 해야 ‘활극’이 아니라 화면이 하나하나 계속 살아있다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들을 신경 많이 쓰는데 자세히는 모르지만 하스미 학파는 ‘영화는 활극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대사로 무언가를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로 소리자체로 끌어가는 것이 진짜 영화라고 보는 것이라 영화 하나하나가 살아있어야 한다. 그것이 모여서 사람이 가슴속에서 감동의 순간을 어느 순간 나오게 해야 한다는 것이 영화의 입장이라 저런 부분들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이 사실입니다. 기존의 디자인들은 다 부셔야하고 망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억은 망각을 필요로 한다’고 명시하는 분이 계십니다. 마르크 오제(Marc Auge)라고 하는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입니다. 저 분이 쓴 책중에 『망각의 형태』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기억은 망각을 필요로 한다’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오래된 과거를 되찾으려면, 가까운 과거는 잊어버려야 한다.’ ‘기억과 망각은 선별하고 가지를 쳐내는 정원사와 같다.’ ‘식물은 변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잊으며 변화한다. 그래서 꽃은 씨앗의 망각이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기억은 망각에 의해 만들어진다. 해안선이 바다에 의해 형성되듯이...’ 과거의 어떤 정보가 있으면 망각이 제칠 것은 제쳐주면 남는 것이 추억이 되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기억을 만드는 것은 망각이라는 겁니다. 망각은 기억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런 것을 아프리카라던가 중동이라던가 이런 인류한적인 사례도 이야기하고 문학 작품들을 가지고도 이야기를 하는데, 오늘 영화와 관련된 것만 이야기를 하자면 망각의 형태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어떻게 분류하는가 하면 시간으로 나누는 겁니다.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눈다면 망각이 과거를 위한 망각이 있고, 현재를 위한 망각, 그리고 미래를 위한 망각 이렇게 세 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첫 번째가 과거를 위한 망각 ‘귀환’이라는 범주로 이 사람은 정리를 합니다. 귀환이란 먼 과거를 되찾기, 과거를 위한 것이니까 현재를 잊어야하는 것이죠. 근접과거 즉 가까운 과거를 망각하는 것이다. 여러분들 무언가를 잊겠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사실은 중요한 포인트는 어디에 있는가하면, 목표지점이죠. 과거라면 과거시점 쪽으로 가져다대면 반대쪽은 덮이는 거죠. 잊겠다고 의지를 가질 때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에 관심을 더 쏟으면 그쪽으로 에너지가가고 결과적으로 망각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죠. 언어체계 A에서 살고 있을 때, B로 넘어간다고 한다면 같은 시간대에 수경으로 넘어간다고 본다면 이 사람은 다른 체계로 넘어가는 것을 다른 시간대와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 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마르크 오제(Marc Auge)같은 경우에는 대표적인 사례로 악마 들림(Zar)을 많이 이야기 합니다. ‘Zar’는 중동 아프리카 전역에 다 퍼져있는 유명한 악마신이죠. 신들리면 그 신의 과거 행적, 역사를 전혀 모르는 소녀가 다 이야기를 하고 그러고 나서 미래를 의식하고 나면 다시 원래 정신으로 돌아가는데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죠. 돌아오는 과정도 신들리기 전 과거로 가기위해서 가까운 과거를 잊는 그런 것들이 보여집니다. 한 가지 곁들여서 말씀 드리면 ‘몬테크리스토의 백작’ 같은 경우에 망각을 시도한 사람인데, 실패한 경우다. 왜 실패했는가하면 먼 과거로 가려면 가까운 과거와 현재는 잊어야 하는데 부인 메르세데스가 변심을 한 게 아닌데 원수와 결혼을 하게 되었죠. 그것을 끝내 잊지 않고 용서를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행복했던 과거시절에 돌아갈 수가 없는 거죠. 가까운 과거를 잊지 못하니까요. 오늘 영화 같은 경우에는 부인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 이 노래 우리 결혼식 때 들었어, 들어가 볼까’ 이때는 신지가 우주인이라는 것을 밝힌 뒤입니다. 그런데 우주인이라는 것을 잊고 신지와의 먼 과거로 가는 거예요.
두 번째 유형은 현재가 목표인겁니다. 이것은 현재로 몰입하기 위해서 당연히 과거와 미래를 잊고 현재만을 위해 사는 것이죠. 대표적인 인류학적 사례는 역할을 바꾸는 의례나 게임을 말하는데요. 왕과 노에가 서로의 역할을 바꾸는 의식 같은 것, 탈춤을 보면 그날만큼은 상놈이 양반에게 탈을 쓰고 꾸짖어도 되고 그날은 모든 것을 봐주는 풍습들이 전 세계적으로다 있잖아요. 아프리카 같은 경우는 되기는 하지만 그 다음날 사형 당하더라고요.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 왕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남과여. 여자가 남자의 역할을 하면서 남자의 언어를 뱉는 것, 이것은 한국의 무당들이 많이 하죠. 무당옷이라는게 남자 옛날 군복이잖아요. 그때 사회적 정체성의 중단이 일어나고 원래 속에 있던 사람은 없애버리고 지워버리죠. 오늘 영화 같은 경우에 개념을 뺏긴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이런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이죠. 오른쪽 보시면 사장인데 까불어 대시죠. 그리고 가족 개념을 버리고나니 너무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 예상되는 여동생. 그렇게 볼 때 신지는 제우스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원래의 신지는 잠들게 했어. 대신 내가 그의 기억과 지식을 이어받아서 새로운 신지가 된 거야.’ 이것은 전형적인 ‘현재 망각형’이다. 제우스가 저런 욕심으로 들어온 거죠.
세 번째 유형은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과거를 잊고, 미래를 살리는 쪽으로 가는 것. 이게 제일 큰 유형이고 의미가 중요한 거죠. 인류학적으로는 입문(initiation)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스님이 되기 위해서 머리를 깎고, 사제가 되기 위해서 서약을 하는 그런 입문이요. 현재는 계속 살아 있어야 그 미래에 다가갈 수 있으니 현재에 살아있는데,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이 신지도 우주인으로 보면 자신을 완전히 잊은 것이잖아요. 우주인이라는 본분을 잊은 거잖아요. 여기서 잠시 사람 신지를 애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아무도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죠. 알크메네 신화의 경우 남편의 이름까지 따서 주제로 연극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 경우에는 신지가 그렇게 사라진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냥 갈 사람이 갔다는 식으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우주인 신지는 재출발을 하고, 나루미도 재출발을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망각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주인도 인간화 되어가고 있잖아요. 본인도 그렇게 크게 바뀌지 않으면 새로운 체계에 동조를 못하는 거죠. 지금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냥 과거의 신지가 아니거든요. 새로운 종류의 사람인거죠. 과거 신지의 기억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고 하나 과거 신지가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을 갖추고 계속 발전시켜나가는 새로운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새로운 세계에 동조해 나가고 맞춰야 하니까 재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사쿠라이도 처음에는 인류의 편 인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완전히 우주인 편이 된 거죠. 우주인의 앞잡이가 되어 낄낄거리다가 작렬하게 무인 비행기에 맞아 죽죠. 출연자 인터뷰를 보니까 칸영화제에 출품을 했을 때, 다 좋은데 본인들이 생각했던 칸영화제에서 보는 사람들의 웃는 대목이 너무 다르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사쿠라이가 비행기 총에 맞아 죽을 때, 프랑스 영화 전문가들이 박수를 치며 아주 재미있어 했다는 거죠. 그래서 사쿠라이가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고 하는데요.(웃음) 사실 웃기긴 웃긴 장면이었죠. 본인이 인류의 편인 것 같다가 나중에 우주인의 앞잡이가 되어 활동하다가 장렬히 죽는 모습이 웃기긴 했습니다. 그런 사쿠라이도 깊은 자기 망각 속에서 새로운 재출발을 기약하는 존재로 나온 것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죠.
결론을 내려 보자면, 이 감독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기반이 대단히 허약하다는 인식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다른 영화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영화에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대서 오는 공포감이 있다. 그리고 인류가 낡은 개념의 속박을 받고 살아간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서 우리 삶이 더 허약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허약한 핵심이유를 이것으로 잡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영화에서는요. 낡은 개념의 속박을 받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사회, 세상이 문제라고 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감독은 일상이 비일상에 침략 받는 것을 기다리고 그리고 있는 것 같아요. 좀 그랬으면, 한번 깨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침략을 받을 때야말로 비로소 망각, 탈-코드, 기존 코드로는 표상 불가능한 것들을 표상 불가능한 것은 심오한 수준일 수 있지만 우리가 낮은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언어체계 A가 전부인 것으로 아는 사람은 B체계에 있는 것을 표상할 수조차 없거든요. 그것을 아예 이해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들리지 않아요. 다른 체계로 넘어가려면 A체계가 먼저 깨져야하죠. 깨지고 B로 넘어간다고 할 때 망각이라든가 무너진다든가 그런 것들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들이고 그것을 통해서 어떤 인류가 리셋될 수 있는 계기이기 때문에 일상이 비일상에 침략하는 사건을 환대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알크메네 신화를 감독이 쓴 것은, 일상이 침식되는 사건의 비유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일상이죠. 남편의 얼굴을 하고 와서 이것처럼 일상적인 것은 없죠. 그런데 비일상이에요. 남편이 아니에요. 그래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바뀌었죠. 어떻게 보면 저 신화를 가지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아내가 남편이 전쟁터 간 사이에 다른 남자와 정이통해서 다른 남자의 아기를 임신했다. 여기서 제가 중요한 이야기를 빠뜨렸는데요. 알크메네 신화에서 알크메네를 화형하려고 했는데 안 돼서 결국 아기를 출산하는데 그 아기가 바로 누구예요? 헤라클래스입니다. 이게 사실은 어떤 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왔을 때, 형상 속에 진실이 있는가, 없는가 문제에서 새로운 존재의 탄생, 창조의 문제와 연관되어있어서 예술가들이 좋아할 주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알크메네 신화를 통해서 고다르가 물었던 것을 구로사와가 계속 묻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편이 바뀌고 아내가 바뀐다고 할 때 어떻게 보면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고 없다고 했을 때 아내가 다른 남자와 정이 통해서 아기를 임신했다. 나중에 변명으로 제우스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했을 수도 있죠. 그런 이야기가 굉장히 많거든요. 돌고래가 변신한 존재가 나에게 와서 나를 임신시켰다 이야기 하거든요. 사람들이 거짓말인지 알아도 다 넘어가는 겁니다. 그 존재가 바로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나오는 존재입니다. 변명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미스터리 속에서 저런 이야기를 다 생각해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지구인과 우주인의 변화는 희망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감독이 그렇게 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때 우주인이 따로 온다고 하기보다 우리 지구 안에서 할 수 있는 다른 체계로의 전환을 말하는 거겠죠.
마지막 대사로 정리해보면 ‘그들이 온 게 지금 이런 시기라는 데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 ‘환자들은 서서히 회복되고 있어’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체계로 바뀌는 거죠. 리셋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미래를 믿어(信じ)보자고’라고 이야기 하는데, 信じ(신지)라고 읽는데 믿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주인공 이름이 신지였잖아요. 의미있는 언어유희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믿음과 진실과 그것이 세상이 구하리라가 마지막에 信じ(신지)라는 말을 통해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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